1화
›먼 훗날, 던전협회 상위 랭커들조차 그의 이름 앞에서 말을 아꼈다.
등급불명의 탐사자.
그를 부르는 유일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3개월 전.
새벽 4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이도현은 눈을 떴다.
몸이 먼저 시간을 알았다.
창밖은 아직 캄캄했다.
산골의 새벽은 도시보다 한 시간은 더 어두웠다.
방 안 공기는 서늘했고, 이불 밖으로 나온 손끝이 잠깐 시렸다.
이도현은 이불을 걷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어제 다듬어 둔 나물을 꺼냈다.
가스불이 파랗게 타올랐다.
도시락통은 늘 정해진 자리에 있었다.
밥을 담고, 나물을 얹고, 계란말이를 부쳤다.
프라이팬 위에서 계란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부엌을 채웠다.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혼자 살아온 시간만큼 몸에 새겨진 순서였다.
반찬 통을 정리하고, 물통에 보리차를 담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매일 이 시간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해외에 있었다.
전화는 한 달에 한 번, 문자는 그보다 뜸했다.
지난달엔 문자 한 통이 왔다.
[잘 지내지. 돈은 부쳤다.]
그게 전부였다.
이도현은 그것에 별다른 감정을 붙이지 않았다.
'익숙해지면 별일 아니야.'
혼잣말처럼 되뇌는 문장이었다.
답장은 짧게 보냈다.
[네.]
그 이상 쓸 말이 없었다.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학교까지는 두 시간.
산길과 자갈길을 번갈아 달려야 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바퀴가 자갈을 튕기는 소리,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산길을 채웠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면서 나무들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길 중간, 작은 밭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약초를 캐놓은 자리였다.
어제 심어둔 더덕 몇 뿌리가 흙 위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도현은 흙을 손끝으로 다독이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그 옆으로 도라지 잎이 이슬을 머금은 채 흔들렸다.
이름 없는 뿌리풀 몇 포기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닌데, 이 짧은 순간만큼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몸이 절반은 지쳐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전거 보관대에 잠시 몸을 기댔다.
숨을 몇 번 몰아쉬고서야 교실로 향했다.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스쳤다가 곧 흩어졌다.
누구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저 산골 애 또 왔네."
뒷자리에서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아이가 킥킥거리며 뭔가를 덧붙였다.
이도현은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손끝이 살짝 굳어 있었다.
'상관없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한서연이 들어왔다.
서연은 가방 대신 큼직한 카메라 백을 메고 있었다.
어깨끈이 무거워 보였는데도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안녕, 산골 소년."
서연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 백을 의자 옆에 걸쳐두고,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대충 넘겼다.
이도현은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도 두 시간 자전거?"
"그럼 뭐 헬기 타고 오냐."
짧게 받아치는 말투였다.
서연은 그 무뚝뚝함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넌 진짜 안 변하는구나."
"변할 게 있나."
"그건 그렇네."
서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책을 꺼냈다.
그 사이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고,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업이 시작되자 교실은 조용해졌다.
칠판에 분필 긁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이도현은 창밖을 잠깐 바라봤다.
산등성이 위로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 풍경 너머, 자신이 매일 지나는 산길이 보였다.
'저 산이 나한테는 학교보다 더 편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산속에서만 그는 자기 방식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칠판 위 글씨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흙 냄새와 자전거 페달의 감촉이 자꾸 머릿속을 스쳤다.
하굣길, 이도현은 늘 그렇듯 산길로 접어들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밭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게 습관이었다.
더덕과 도라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없는 뿌리풀들.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았고, 일부는 그냥 알 수 없는 확신 때문에 계속 키웠다.
쪼그려 앉아 하나씩 잎을 뒤집어보는 것도 그날의 일과였다.
'이건 좀 이상하게 잘 자라는데.'
유독 빨리, 유독 크게 자라는 밭 한 귀퉁이가 있었다.
다른 자리보다 잎의 색이 짙었고, 줄기도 두 배는 굵었다.
이도현은 별생각 없이 흙을 만졌다.
손끝이 살짝 저릿했다.
찌릿한 감각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뭐지, 방금.'
잠깐 손을 들여다봤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감각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했다.
자전거 페달을 다시 밟았다.
산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속도를 올렸다.
그날 밤, 이도현은 저녁을 먹고 방 안에 앉아 휴대폰을 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이불에 등을 기댄 채였다.
서연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내일 너 줄 거 있어. 기대해.]
이도현은 그 문장을 잠깐 들여다봤다.
'뭘 준다는 거야.'
의심 반, 궁금함 반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지만, 그 짧은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가 그것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물건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