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년 수련, 첫날 들켰다

1화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지리산에서는 해가 뜨기 전 기상이 당연했으니, 몸에 새겨진 습관은 서울로 돌아왔다고 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둑했다. '벌써 개학이라니.'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천장을 바라봤다. 스승님이라면 이 시간에 벌써 산 정상까지 뛰어 올라갔다가 내려오셨을 것이다. '스승님은 지금 뭐 하고 계실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7년이었다. 여덟 살에 부모님 손을 놓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열다섯이 되어서야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엔 숨만 조금 세게 쉬어도 어지럼증이 났고, 계단 두 층만 올라가도 헐떡였다. 의사들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큰 병원 세 곳을 돌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선천적 허약체질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부모님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산속 도인이라는 사람에게 나를 맡겼다. 그리고 그 도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에 발을 딱 붙이는 순간, 몸의 중심이 그대로 잡혔다. 예전 같으면 일어나자마자 어지러워 벽을 짚었을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각조차 낯설게 느껴질 만큼 멀어졌다. 거울 앞에 섰다. 마른 체형은 여전했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달랐다. 뼈마디 하나하나에 기운이 흐르고 있었고, 근육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손을 들어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겉보기엔 그냥 마른 팔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실처럼 촘촘하게 짜인 기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풀렸다. 스승님은 늘 말씀하셨다. "겉을 부풀리는 건 하수의 방법이다. 안이 단단해야 진짜지." "근육은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것이지." "덩치가 크다고 강한 게 아니다. 강한 놈은 조용히 서 있어도 무섭다." 그 말이 옳았다는 걸, 나는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현관을 나섰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어색했다. 7년간 도포와 무명옷만 입어온 몸에, 딱딱한 교복 셔츠 깃이 목을 조이는 느낌이 낯설었다. 한빛고등학교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어머니는 아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리 진이가 이렇게 컸구나." 어머니는 몇 번이나 내 얼굴을 만지려다 말고 손을 거뒀다. 아버지는 말없이 신발장 앞에서 내 운동화 끈을 괜히 다시 매주셨다. 민망해서 대충 인사하고 나왔지만, 속으로는 나도 조금 울컥했다. 7년 만에 돌아온 서울은 낯설었다. 건물은 높아졌고, 사람들은 다들 손에 뭔가를 들고 걸었다.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이었다. 산속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던 것이었다. 버스가 신호도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저 앞 기둥에 초록 불이 켜져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였다. '저런 것도 배워야 하는구나.' 7년 전 여덟 살 아이의 눈으로 남아 있던 세상과, 지금 눈앞의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교문 앞에 서니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몬스터도, 절벽도, 맹수도 무섭지 않았던 내가, 겨우 학교 정문 앞에서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이게 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산에서는 절벽 끝에 서도 숨이 흐트러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냥 걸어 들어가는 것뿐인데도 발이 무거웠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산에서 짐승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교문을 지나는 학생들의 무리 속으로 나도 섞여 들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웃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낀 채 리듬에 맞춰 발을 굴렀다. 나는 그 사이에서 혼자 두 손을 꽉 쥔 채 걸었다. '침착하자.' 입학식은 별일 없이 끝났다. 교실은 1학년 3반,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이 자리를 채웠다. 책상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나는 창가 쪽 자리를 찾아 앉았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자리였다. 담임인 김민재 선생님이 들어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걸걸했고, 출석부를 넘기는 손짓이 익숙해 보였다. "강철수." "네!"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선우진." "네." 대답하고 앉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키는 컸지만 체격은 의외로 마른 남학생이었다. 눈매만큼은 여전히 매서웠다. '저 얼굴···' 기억이 스쳤다. 강철수. 초등학교 5학년 때, 매일같이 나를 화장실에 끌고 가 돈을 뺏던 놈이었다. 키가 작고 숨이 짧던 나를, 저 녀석은 벌레 취급했다. 그때는 도망칠 힘도 없어서, 뺏기는 돈을 그냥 눈물만 삼키며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그 강철수가, 하필이면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다. 허망했다. 출석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몇 가지 공지를 전달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자기소개 정도만 하고 마칠 거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그 웅성거림 속에서도 강철수의 시선이 계속 내 등에 꽂혀 있는 걸 느꼈다. '설마 기억하고 있나.'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쉬는 시간이 되자 강철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옆에는 말상 얼굴의 박창수, 바위 같은 체형의 석두식이 따라붙었다. 셋이 함께 다가오는 모양새가, 예전 그 화장실 앞 풍경과 소름 끼치게 비슷했다. "어? 이거 누구야." 강철수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선우진이잖아, 초딩 때 그 약골." 박창수가 낄낄거렸다. "허약이 아니야?" "야, 진짜 그때 그대로네.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다." 석두식은 말없이 내 어깨를 툭 쳤다. 힘이 담긴 손짓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넘어졌을 손짓이었다. 그러나 내 발은 흔들리지 않았다. 강철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라, 안 넘어지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조심해야 한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과신은 독이다. 힘을 드러내는 순간, 세상은 너를 다르게 본다." "세상엔 네 힘을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놈들이 더 많다." "운 좋았네." 강철수가 웃으며 내 가슴팍을 밀었다. 이번엔 제대로 힘이 실렸다. 몸이 밀려나는 방향으로, 나는 아주 작게 무게중심을 흘렸다. 호신술의 기본, 힘을 받아 흘리는 동작이었다. 발끝에서부터 무릎, 허리까지 힘의 흐름을 그대로 타고 넘기는 감각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겉으로는 그냥 몇 걸음 밀려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넘어질 뻔한 걸 스스로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위태로운 척 몸을 흔들었다. 강철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흐흐, 여전히 힘없는 건 똑같네." 박창수와 석두식이 따라 웃었다. "야, 밀어도 뭐 반응이 없어, 재미없다." 안도의 숨이 나왔다. '다행이다, 아직 안 들켰다.'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긴장이었다. '힘을 숨기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그때 옆자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돌아보니 검은 머리를 길게 땋은, 안경을 쓴 여학생이 강철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교실에서 이러지 마." 강철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넌." "안혜원. 같은 반이야." 안혜원은 팔짱을 낀 채 강철수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 시선에 밀린 건지, 강철수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강철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콧방귀를 뀌며 자리로 돌아갔다. "쳇, 재미없게." 박창수와 석두식도 슬금슬금 뒤를 따랐다. 셋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제야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안혜원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고마워." "뭘, 저런 애들은 원래 저래." 안혜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앞을 보고 앉았다.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고마웠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앞으로 3년, 이걸 계속 참아야 하나.'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 나는 강철수네 무리와 마주치지 않으려 일부러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힘을 숨기는 게 이렇게까지 피곤한 일이었나.' 산에서는 힘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맹수를 마주할 때도, 오히려 있는 힘을 다 쏟아내야 살아남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반대였다.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안 되는 곳. 그게 바로 학교였다. 7년의 수련은 나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힘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강철수의 눈빛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 녀석, 예전처럼 다시 시작하려는 걸까.' 그 눈빛은 단순한 반가움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가늠하려는 눈빛이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짙게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듯이. 그리고 그 예감은, 오래 걸리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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