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남궁혁이 왕부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시종들의 인사 소리가 담장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몸을 겨우 이끌고 창가에 붙어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말이 스무 마리쯤 됐다. 시종만 그만큼이었고, 짐수레도 두어 대 딸려 왔다. 약혼자 얼굴 한번 보러 오는 길에 이 정도 행렬을 끌고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힘자랑이었다. 그리고 그 힘자랑이 통하는 상대가 바로 우리 집이었다.
남해왕의 손자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붉은 비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겉옷, 허리엔 보검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검이 장식용이 아니라는 건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검을 차본 적이 있는 몸의 걸음이었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그 웃음이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종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저런 웃음을 짓는 인간은 대체로 남을 편하게 해줄 생각이 없는 부류였다.
"약혼녀는 어디 있느냐."
그가 처음 던진 말이 그거였다. 인사도, 예도 없었다. 왕부 관리들이 서둘러 굽신거리며 뭐라 답했지만, 남궁혁은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걸음마다 시종들이 허둥지둥 뒤를 따랐고, 그 뒤를 할아버지가 급히 쫓아가며 뭐라 말을 붙이려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나는 그 순간 몸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지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뛰쳐나가 막고 싶은 마음과, 열 걸음도 못 가 쓰러질 게 뻔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 지독했다. 전생이었다면 저 검을 뽑기도 전에 목을 딸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창틀 붙잡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팔이 후들거렸다.
"하린 누나 어디 있어?"
방문을 벌컥 열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손을 저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별당에 계실 거다. 넌 나서지 마라."
"엄마."
"겸아, 제발. 네 몸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그 말이 맞았다. 맞는 말이라서 더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곧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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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당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발을 뗄 때마다 숨이 가빴고, 시야 가장자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별당 앞에 도착했을 때, 남궁혁은 이미 누나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누나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시종 몇이 주위에 서 있었는데, 다들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더 화가 났다. 저것들도 한통속이었다.
"이거 놓으세요."
"약혼자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건가?"
남궁혁이 웃으며 누나의 얼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 정말이지. 저런 낯짝으로 웃을 자격이 있나 싶었다.
"놓으라고 했잖아요!"
"북천왕부의 딸이라기엔 예의가 없구나.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인가?"
그가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고 누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손목이 붉어지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나는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정확히는 뛰어들었다기보다 비틀거리며 나아갔다는 게 맞았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인데 다리가 자꾸 꺾였다.
"손 놓으시죠."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좀 더 위엄 있게 말하고 싶었는데, 몸이 협조를 안 해줬다. 남궁혁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시선이 딱 그거였다. 이런 걸레짝 같은 몸으로 뭘 하겠다고, 하는 눈빛.
"넌 뭐냐."
"이 집 아들이요."
"아, 그 병약하다는 서출."
서출이라는 말에 어금니가 저릿하게 아팠다. 왕부 안에서도 다들 알고 있었는지, 남궁혁마저 그 소문을 안다는 사실이 더 씁쓸했다. 하지만 지금 자존심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공자님, 이 사람은 제 손윕니다. 예를 갖춰 대해주십시오."
"예를 갖춰?"
그가 누나의 팔을 놓더니 대신 내 어깨를 밀쳤다. 별로 세게 민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숨이 컥 막히고 시야가 흔들렸다.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뼈마디가 다 아렸다. 몸이 이렇게 약한 게 이런 순간엔 정말 화가 났다. 전생엔 이 정도 밀침엔 반보도 안 밀렸을 텐데.
"그 몸으로 뭘 어쩔 셈이냐?"
남궁혁이 나를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여유가 뚝뚝 흘러넘쳤다.
"약혼녀와 그 가족들이 어떻게 되든, 그건 다 내 손 안에 있는 일이다. 남해왕부의 힘이 네 아비 왕부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거냐?"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북천왕부는 왕가라는 이름값만 남아있을 뿐, 실질적인 세력은 남해왕부에 훨씬 못 미쳤다. 시종들 숫자만 봐도, 저 허리에 찬 검의 광택만 봐도 알 수 있는 격차였다. 이건 힘의 논리였고, 힘의 논리 앞에서 예의니 도리니 하는 건 사치였다. 세상 어디든 똑같았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강한 놈이 법이었다.
"누나한테서 손 떼라고."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놀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남궁혁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이 자식이……"
그가 발을 들어 나를 향해 내리치려던 그 순간, 누나가 몸을 던져 나를 감쌌다. 그 조그만 체구로 나를 다 가릴 수도 없으면서, 굳이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세요!"
"약혼녀가 대신 맞아주겠다는 거냐?"
남궁혁이 낄낄거리며 손을 내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여유로운지,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생에서 배신당해 죽을 때보다도 더 순수한 살의였다. 그때는 적어도 상대가 나를 죽일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건 그냥 재미로 사람을 밟는 거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대신, 하린. 사흘 뒤 연회에는 웃는 얼굴로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이 왕부가 남해왕부에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네 아버지가 알아서 상상해보라고 전해줘."
말투는 태평한데 내용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협박이라는 걸 이렇게 웃으며 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시종들을 이끌고 별당을 떠났다. 말발굽 소리가 담장 밖으로 멀어질 때까지, 나는 바닥에 앉은 채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무력이 없다는 게 이렇게 서러운 감각인 줄은 전생에서도 몰랐다. 그때는 적어도 검을 쥘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검이고 뭐고, 저 자식 발끝에도 못 미치는 몸뚱이 하나가 전부였다.
"겸아, 괜찮아?"
누나가 나를 부축하며 물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를 부축하는 손이 오히려 나보다 더 떨렸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구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손으로 입을 막았을 때 손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코피였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몸도, 상황도, 전부 다. 누나는 내 말을 안 믿는 눈치였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것도 나름의 배려였다.
시종 몇이 여전히 별당 마당에 남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나를 힐끗 보고는 픽 웃었다.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서출 도련님이 검도 못 배운 몸으로 나서봤자, 라는 조롱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눈에 새겨뒀다. 언젠가 반드시 되갚아줄 목록에 이름 하나를 더 적어넣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낮에 받은 충격 때문인지 몸살처럼 열이 올랐다. 이불을 두 겹으로 덮었는데도 손끝이 시렸다.
단전 근처에서 그 이물감이 다시 요동쳤다. 마치 내 분노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것이 처음으로 뭔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감각, 그 낯설고 불쾌한 움직임에 나는 숨을 죽였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분명히 들린 목소리였다. 내 것이 아닌.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분명 내 안에서 울렸다.
'거기 누구야.'
속으로 되물었는데, 대답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말만 하고 다시 잠든 것처럼, 이물감은 조용해졌다. 나는 한참을 어둠 속에 앉아 내 배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뭔가가 분명히 거기 있었다.
이거, 이제 와서 나한테 말을 거는 이유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