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가슴에 칼이 박히던 순간, 나는 웃었다.
정확히는 웃으려 했다. 입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칼끝이 심장을 지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계산이라니, 참 나답다 싶었다.
백 년 전, 대현제국의 황자였던 나 유겸은 내가 지키려던 여자의 손에 심장을 꿰뚫렸다. 설유란. 지금은 이 나라의 여제이자 삼십육도 중 절반을 손아귀에 쥔 존재고, 그때는 그저 내가 아꼈던 사촌누이였다. 손끝이 시렸다. 피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시렸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때는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다 지난 얘기다. 죽은 사람이 복수를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이니까. 애초에 복수할 몸도 없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눈이 떠졌다.
천장이 낯설었다. 낡은 서까래에 거미줄이 걸려 있고, 방 안 공기는 축축한 흙냄새를 품고 있었다. 눈알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 하나 드는 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라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봤다. 다 붙어 있었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사람 몸에는 보통 이런 감각이 없을 텐데. 이거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죽지 않았다. 다만 다른 몸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백 년이 지난 대현제국, 북천왕부 설죽원의 후미진 방구석에서, 병약한 열다섯 살 소년 유겸의 몸으로.
이름조차 같았다. 이게 우연인지 누군가의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다시 유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신조차 성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독하게 정교한 함정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뻑뻑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에서 마수를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저잣거리에서 떡장수를 마주치는 것만큼 흔했다. 대현제국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딘가에 짐승 한 마리씩을 봉인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마수와 인간이 뒤섞여 사는 나라였다. 시장에서 국수를 팔던 노인이 소매를 걷으면 팔뚝에 뱀 문양이 스멀스멀 움직이고, 관아의 포졸이 눈을 부릅뜨면 눈동자가 잠깐 짐승의 것으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그런 걸 보고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다. 익숙해지면 무섬증도 무뎌지는 법이니까.
삼십육도 중 절반을 다스리는 여제 설유란도, 소문에 따르면 몸속에 백 마리 이상의 요괴를 부린다고 했다. 헛소문이든 아니든, 그 여자라면 그 정도는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백 년 전 내 심장을 꿰뚫을 때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나였다. 이 병약한 몸뚱이는 그냥 병약한 게 아니었다. 가슴 안쪽 깊은 곳, 정확히는 단전 근처에서 무언가가 늘 웅크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쉬면 그것이 꿈틀거렸고, 그럴 때마다 목구멍으로 피 맛이 올라왔다. 처음엔 그냥 몸이 약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가가 있었다. 뭔가 아주 크고, 아주 오래된 것이. 마치 잠든 짐승이 배 속에서 몸을 뒤집는 것 같았다. 잠들었다는 게 다행인지, 언제 깨어날지 몰라 불안한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한서은. 이 몸의 어머니였다. 평민 출신으로, 죽은 아버지 유창현의 고집 때문에 북천왕가 며느리가 되었다는 사람. 왕부 안에서 그녀의 위치는 그리 좋지 못했다. 정실이 아니었고, 낳은 자식들도 서열이 낮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늘 걱정이 먼저 앉았다. 눈가에 잡힌 잔주름마저도 나 때문에 생긴 것 같아서,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괜찮지 않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고,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할 때마다 그 눈에 스치는 죄책감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늘 거짓말을 했다. 이 정도 거짓말이면 죄가 안 되겠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백 년을 살고도 이런 잔망스러운 위로조차 못 배웠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국 좀 가져왔는데, 뜨거울 때 드세요."
그녀가 내려놓은 소반 위에 죽 한 그릇과 삶은 나물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죽에서는 마늘과 파 냄새가 옅게 났다. 왕부의 다른 곳에서는 육류와 귀한 향신료가 넘친다고 들었는데, 설죽원엔 늘 이런 소박한 상만 올라왔다. 서러운 일이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았다. 전생에서 배가 곯아본 적 없던 나로서는 이것조차 새로운 경험이었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후들거렸다. 죽 한 숟갈을 삼키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 걸 보면, 이 몸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알 만했다.
"천천히 드세요. 급하게 삼키면 또 체하니까."
"네."
대답은 순했지만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여자가 나를 진짜 아들로 여긴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유겸이라는 이름을 빌린 낯선 자였다. 죄책감과 계산이 동시에 굴러다녔다. 도움이 되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겸아."
방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하린. 이복 누나였다. 정실의 딸이지만, 그녀 역시 이 왕부 안에서 그리 대접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은근한 무시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나를 챙겼다. 진짜 남매처럼.
"몸은 좀 어때?"
"살아있으니 됐죠."
"싱거운 소리."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와 이불깃을 정리해주며 웃었다.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버릇이 나와 닮았다고 어머니가 종종 말했었는데, 정작 나는 이 몸의 진짜 기억을 다 갖고 있는 게 아니라서 그게 진짜 닮음인지 우연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웃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슬며시 풀리는 것만은 확실했다.
"밥은 다 먹었어?"
"먹는 중이에요."
"천천히 먹어. 어머니 잔소리 더 늘어나기 전에."
나는 그 웃음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 가족이라는 걸 제대로 누려본 적 없었던 나로서는, 이 초라한 방과 소박한 밥상과 걱정해주는 두 여자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왕궁에서 나고 자란 황자였음에도, 정작 진짜 가족의 온기라는 걸 이 허름한 방에서 처음 배우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문제는 이 평온이 오래 못 갈 거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 년을 살아본 사람의 직감이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순간에 발동하는 법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다시 그 감각이 올라왔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목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어머니와 누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취소해야 했다. 이 몸속에 있는 게 뭔지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문제였으니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의원을 불러도 그저 몸이 허약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으니, 이건 순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그날 오후, 설죽원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시비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어머니께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치맛자락이 흙바닥에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급한 걸음이었다.
"왕비마님, 남해왕의 손자 남궁혁 공자께서 오늘 저녁 왕부에 드신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반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것을.
"남궁혁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일로."
"본가에서 미리 통보도 없이 그저 오늘 오신다는 전언만……"
"예고도 없이 왕부에 드신다고요?"
시비는 대답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하린이는 알고 있나요?"
"이미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나가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남궁혁이라니……"
"하린 아가씨의…… 약혼자시라고 들었습니다."
누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걸, 나는 그 자리에서 똑똑히 보았다. 방금까지 나를 놀리며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나는 이 남궁혁이라는 이름이 그저 성가신 손님 정도가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어머니도, 누나도,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방 안 가득 무거운 공기만 내려앉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다시 한번 가슴 안쪽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