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방 밖에서는 밥솥 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동그란 눈, 짧게 깎은 머리, 볼에 아직 살이 덜 빠진 아홉 살짜리 남자아이의 얼굴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져보았다.
손끝이 떨렸다.
'1983년... 인가.'
나는 방 안 달력을 보고 계산했다.
달력에는 큼직한 숫자로 '4월'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옆에 누군가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놓은 날짜가 하나 있었다.
'토요일.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달력 아래 걸린 시간표를 보았다.
김도윤, 3학년 2반이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몸은 아홉 살,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이 된 김도윤이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나이가 쉰하나였으니, 42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다.
"도윤이 뭐 해, 밥 다 됐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 식탁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찌개에서 올라오는 김이 좁은 부엌을 데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서 있었다.
앞치마에는 노란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여러 번 빨아서인지 색이 다 빠져 있었다.
마흔, 아니면 마흔한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12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야윈 얼굴이 아니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직 아무 병도 걸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목이 메어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런 얼굴이야, 밥 먹기 싫어?" 어머니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나는 겨우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버지는 신문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스포츠면에는 프로야구 개막전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올해는 삼성이 좀 하려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밥그릇을 손에 쥐었다.
손이 너무 작아서, 밥그릇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숟가락을 뜨는 것조차 낯설었다.
51년 동안 익숙했던 손목의 움직임이 이 작은 팔에는 맞지 않았다.
집은 낡았다. 도배지 곳곳이 누렇게 얼룩져 있었고, 창문 틀에는 성애 방지용 비닐이 테이프로 덧대어져 있었다.
부엌 벽에는 달력과 함께 오래된 라디오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다이얼이 반쯤 부서져 있었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볕이 잘 들지 않는 1층이었다.
'가난했었지, 그때.'
나는 밥을 먹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계란말이를 씹으며 나는 이 집이 몇 평이나 될지 헤아려봤다.
방 두 개에 부엌, 화장실은 밖에 딸린 구조.
넉넉히 잡아도 열두 평쯤이었다.
이 시절에는 이 정도도 흔한 형편이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는 가방을 챙겼다.
가방은 천으로 된 것이었는데, 어깨끈이 한쪽만 낡아 색이 바뀌어 있었다.
학교 가는 길, 골목 어귀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불렀다.
"도윤아!"
키가 나보다 조금 큰 남자아이였다. 낡은 운동화, 어깨에 멘 야구 글러브.
오현우였다.
나는 그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참았다.
기억 속 그 이름을, 이 아홉 살의 얼굴로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다.
"어... 안녕." 나는 대답했다.
"너 오늘 우리 팀 훈련 보러 안 올래? 초록동 유소년 야구단, 감독님이 새로 애들 뽑는다더라." 현우가 말했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51세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쳤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시.'
하지만 동시에, 그날의 통증도 함께 떠올랐다.
어깨가 부서지던 순간, 병원 천장의 형광등,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마운드에 서지 못했던 세월들.
"나는... 야구 안 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너 저번에 공 던지는 거 봤는데 잘하더라." 현우가 물었다.
나는 대답을 못했다.
이 몸은 아직 한 번도 야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현우가 말한 '저번'이라는 건, 이 세계의 김도윤이 겪었던 어떤 순간일 것이다.
나는 그 기억이 없었다.
이 아홉 살짜리 몸에게는 있었을 어떤 하루가, 51년의 기억을 가진 나에게는 통째로 비어 있었다.
"몸 상태만 조심하면... 괜찮을 수도 있어."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 현우가 물었다.
"아니, 갈게. 훈련 보러." 나는 대답했다.
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진짜? 잘됐다! 오늘 4시, 초록동 운동장이야!" 현우가 소리쳤다.
현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뛰어갔다.
나는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 아이는 열 살, 아니 아홉 살이었다.
51년의 기억을 가진 내 눈에는 너무 작고 여려 보였다.
'이번엔... 다르게 해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학교로 걸어갔다.
학교 가는 내내, 나는 골목마다 낯익은 간판들을 눈에 담았다.
문방구, 만화방, 그리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슈퍼마켓.
모두 12년 전, 아니 42년 후에는 사라지고 없을 풍경들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봤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숫자들이, 내 눈에는 유치할 정도로 쉬워 보였다.
'이걸... 다시 배워야 하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후 4시, 초록동 운동장에는 이미 스무 명 가까운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은 흙바닥이었고, 한쪽 구석에 철제 관람석이 낡은 채로 서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글러브를 끼고 있었는데, 브랜드도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어른을 하나 발견했다.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챙이 낡은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걸음걸이에 힘이 실려 있었다.
초록동 유소년 야구단 감독, 박기수였다.
그는 아이들을 하나씩 훑어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낡은 수첩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적었다 지웠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 왠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박기수의 눈이 내 얼굴에서, 그리고 내 손에서 멈췄다.
마치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