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세 시,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
나는 5.5톤 냉동탑차를 주차라인에 맞춰 세우고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자 정적이 몰려왔다.
계기판에는 오늘 하루 뛴 거리가 찍혀 있었다. 412킬로미터.
새벽 다섯 시에 시작해서 스물두 시간째였다.
김도윤, 51세,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9년째다.
트럭을 몰기 전에는 다른 일을 할 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일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허리가 뻐근했고, 왼팔 어깨 아래쪽이 저릿하게 당겨왔다.
이 통증은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오래된 인대 손상이라고 했다. 수술은 세 번 받았지만 근본적인 건 고쳐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채로 담배를 한 대 피울까 하다가 관뒀다.
의사가 담배 끊으라고 한 지 3년째인데 아직 완전히 못 끊었다.
대신 트럭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밤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4월인데도 새벽엔 아직 쌀쌀했다.
나는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편의점 쪽으로 걸었다.
편의점 유리문에 붙은 스티커가 반쯤 떨어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삼각김밥 두 개와 캔커피 하나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4,900원.
아르바이트생은 졸린 눈으로 바코드를 찍었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나는 카드를 내밀며 저 나이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잠깐 생각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편의점 옆 구석에 놓인 낡은 아케이드 기기가 눈에 들어왔다.
야구 게임기였다.
화면 상단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글씨로 '스트라이크 존'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계 옆면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동전 투입구 아래로 누군가 스티커를 붙였다가 뜯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기계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요즘 휴게소는 다 스마트폰 충전기랑 안마의자만 갖다놓는데.
나는 삼각김밥이 담긴 봉투를 트럭 문 손잡이에 걸어두고,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배트를 쥐었다.
플라스틱 배트는 손잡이 부분이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화면 속에는 투수가 있었다.
마운드에 선 열여덟 살짜리 투수. 왼손. 팔을 크게 휘두르며 공을 던졌다.
그 순간, 왼팔이 다시 당겨왔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더 깊게, 뼈 안쪽까지 저려오는 느낌이었다.
32년 전, 고3 봄. 지역 예선 결승전.
나는 그날 아침 어깨가 이상하다고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은 웃으면서 어깨 안 아픈 투수가 어디 있냐고 했다.
나는 9회 말까지 던졌다.
7회부터 이미 어깨에서 뭔가 뜯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래도 감독은 계속 던지라고 했다. 팀이 이겨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날 어깨와 팔꿈치가 완전히 망가졌다.
병원에서는 회전근개가 완전히 파열됐다고 했다. 팔꿈치 인대도 같이 늘어났다고 했다.
수술을 세 번 받았다.
첫 번째 수술 후에 다시 던져보려고 했지만, 공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어깨가 통째로 뜯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대로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는 공을 던지지 못했다.
스무 살이었다. 프로 스카우트 세 팀이 관심을 보이던 여름이었다.
화면 속 공이 배트를 지나쳐 스트라이크존에 박혔다.
전자음이 짧게 울리며 스트라이크 판정이 떴다.
나는 캔커피를 든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때 조금만 참았더라면.'
'감독한테 못 던진다고 한 마디만 했더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게임기 옆면을 손으로 짚었다.
낡은 철판이 차갑게 손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변했다.
나는 동전이 잘못 들어갔나 싶어 기계를 툭툭 쳤다.
반응이 없었다.
한 번 더 세게 쳤다.
화면에 흰 글씨가 떠올랐다.
[야구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뭐야, 이거.'
장난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누가 이런 이벤트 화면을 만들어놨나, 요즘 이런 것도 유행인가 싶었다.
화면 아래에는 '예' '아니오' 버튼이 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계산대 안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이 기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반쯤 취한 사람처럼, 손끝으로 '예'를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에 짧은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화면이 하얗게 번쩍였다.
눈이 시려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음 순간 느껴진 건 누군가 내 이불을 걷어내는 손길이었다.
이불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익숙한, 그러면서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냄새였다.
"도윤아, 학교 늦어! 얼른 일어나!"
여자의 목소리였다. 낯설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천장에 형광등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형광등 커버 한쪽이 깨져서 철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벽지에는 곰돌이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저기 색이 바래 있었다.
방은 작았다. 다섯 평이나 될까.
책상 위에는 만화가 그려진 필통과 국어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팔이 짧았다.
손도 작았다.
손등에 잡히던 굳은살도 없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다리를 내려다봤다. 종아리가 앙상했다.
51년을 살아온 몸이 아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 짧은 머리, 앞니 하나가 살짝 벌어진 입.
분명히 낯설지 않았다.
오래된 사진첩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서른두 살에 낳은, 김도윤의 아홉 살 때 얼굴.
부엌 어딘가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된장국 끓는 냄새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문 밖에서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안 일어났어?"
발소리가 방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