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결투를 시작한다."
남광호의 짧은 선언과 함께 결투장을 둘러싼 결계막이 위이이이잉—낮은 진동음을 내며 활성화되었고, 그 순간 도훈과 서린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시선들이 일순 숨을 삼켰으며, 누군가는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결투장 안팎을 아우르는 정적이 짙어졌다.
'설한가의 막내라고 했나.'
도훈은 서린을 마주한 채 속으로 되새겼다. 불출중이라는 평가가 붙어 있었으나, 그 평가가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직접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는 애써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상대의 자세를 살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도훈이었다.
'속도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위이이이잉!
질풍신뢰가 발동하는 순간 도훈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만을 남긴 채 사라졌고, 그 잔상은 곧바로 서린의 좌측면을 파고들며 촤아아아악—전격의 선을 그렸다. 결계막 안쪽 공기가 순간적으로 팽창하며 파열음을 흘렸고, 그 여파에 관중석 앞줄에 앉아 있던 몇몇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끝났다.'
그렇게 확신하며 손을 뻗은 순간, 도훈의 눈앞에서 서린의 신형이 물결처럼 흔들리며 사라졌다.
촤악!
허공을 스친 것은 서린의 잔상이 아니라, 물의 막이었다. 손끝에 닿은 서늘한 촉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도훈은 자신이 헛손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도훈이 미처 반응하지 못한 사이, 서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담담하게 울렸다.
"금생수(金生水)."
그 말과 동시에, 도훈의 발밑에서 갑작스레 솟아오른 물기둥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촤아아아아악!
금속이 물을 낳는다는 오행의 이치를 그대로 구현한 능력이었으니, 서린은 주변에 존재하는 미량의 금속 기운을 매개로 순식간에 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결투장 바닥에 깔린 결계석의 미세한 금속 입자마저 끌어다 쓴 것이었으리라.
'설한가의 능력이 이런 방식이었나.'
뒤늦게 그 원리를 짐작한 도훈은 물기둥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질풍신뢰를 발동시켰다.
위이이잉!
간발의 차로 물기둥을 빠져나온 도훈이 자세를 바로잡는 사이, 물줄기는 바닥에 흩어지며 잔잔한 파문을 그렸고, 그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서린은 이미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린은 소매 속에서 작은 벼루와 붓을 꺼내 들며 그 위에 먹물을 흩뿌렸다.
촤악, 촤아악.
허공에 뿌려진 먹물이 순간적으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가 살아 움직이듯, 검은 먹의 파편들이 뭉쳐지며 거대한 매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날개를 펼치는 매의 윤곽선을 따라 먹빛이 짙어졌다가 옅어지기를 반복했으니, 그 명암의 변화만으로도 살아있는 맹수의 기세가 느껴질 정도였다.
'묵화(墨畫)라니.'
먹물로 형상을 그려 실체화시키는 기술이었으니, 도훈은 그제야 서린의 진짜 재능이 단순한 냉기가 아니라 금생수와 묵화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능력을 동시에 다루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게 어떻게 불출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거지.'
능력의 조합만 놓고 보아도 결코 하위 서열에 머물러야 할 재능이 아니었다. 오행의 이치와 그림의 예술을 동시에 무예로 치환해낸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랜 수련의 결과일 것이라고 도훈은 짐작했다.
먹으로 이루어진 매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도훈을 향해 쏘아져 왔다.
콰아아앙!
도훈이 다급하게 몸을 틀어 회피했으나, 매의 발톱이 그의 어깻죽지를 스치며 옷자락을 갈랐고, 그 순간 스며든 서늘한 감촉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한 먹물이 아니야. 실체를 지닌 공격이다.'
뚜두둑.
무리하게 몸을 꺾은 탓에 관절 어딘가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으나, 도훈은 신음조차 삼키며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소매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지금은 그런 통증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흐음, 예상보다 잘 버티시네요."
서린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담담함이 배어 있었으나, 그 안에 숨은 호승심만큼은 결투가 시작되기 전보다 한층 짙어져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다음 붓질을 준비하는 서린의 모습에서, 도훈은 저 침착함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무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도훈은 서린과의 거리를 재빨리 가늠하며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낮다는 판단이 섰으니, 이제는 속도와 전격을 결합한 연속 공세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질풍신뢰의 진짜 활용법은 지금부터다.'
한 번의 속도로는 서린의 능력을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상, 남은 방법은 그 속도를 겹겹이 쌓아 상대가 미처 대응할 틈조차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잉! 위이이이이잉!
연속으로 발동되는 신법 속에서 도훈의 신형이 결투장 전역을 어지럽게 넘나들었고, 그 궤적을 따라 청백색 전류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잔상들이 결투장 곳곳에 남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마치 하나의 도훈이 아니라 여러 명의 도훈이 동시에 서린을 노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촤아아아아악!
번뜩이는 전격의 그물이 서린을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순간, 도훈은 처음으로 자신이 확실한 우세를 잡았다는 확신을 느꼈다. 서린의 발걸음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며, 도훈은 이번 공세야말로 결정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엔 확실히···'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서린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다시 한번 손끝을 움직였다. 그 손끝의 움직임은 지금까지의 어떤 동작보다도 느긋했으니, 오히려 그 느긋함이 도훈의 등줄기에 서늘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금생수, 그리고 묵화—연환(連環)."
낮은 그 한마디와 함께, 결투장 전체를 휘감으며 솟아오른 물기둥과 먹빛 형상들이 하나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물과 먹이 서로를 잡아먹듯 섞여 들어가며 거대한 소용돌이의 형태를 갖추어갔고, 그 소용돌이의 표면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매의 형상들이 떠올랐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위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앙! 촤아아아아아악!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며 결투장 전체가 물과 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회오리 속에 휘말려 들어갔고, 그 중심에 갇힌 도훈은 순간적으로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먹빛과 물기가 뒤섞이며 눈앞의 모든 형상이 뒤틀려 보였고, 어느 쪽이 위이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혼란이 그를 삼켰다.
'이건··· 예상 못 한 규모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 도훈은 처음으로 자신이 이 결투를 완전히 오판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설한가의 불출중이라는 평가는, 결코 재능이 부족해서 붙은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저 침착함 뒤에 이런 걸 숨기고 있었다니.'
회오리 속에서 점점 옅어지는 시야를 향해 다급히 이를 악물며, 도훈은 자신의 몸을 휘감아오는 물과 먹의 압력에 저항하려 했으나, 팔다리에 힘을 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계막 너머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조차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진 것처럼 들렸고, 온몸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이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콰드드득!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그의 몸 어딘가에서 들려왔으나, 그것이 자신의 관절인지 아니면 결계막의 균열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도훈의 의식은 빠르게 흐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