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덫에 걸린 것은 세상이다

5화

박태호 선생님이 나를 다시 불렀을 때는, 소문이 퍼진 지 일주일쯤 지난 뒤였다. 교무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서자, 선생님은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잔뜩 쌓아두고 계셨다. "도윤아, 이번 주말에 초급 던전 견학이 있다. 3학년 탐색자 양성반 전체가 참여하는 공식 일정이야." "던전 견학이요?"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직접 던전 내부를 체험하고, 하급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감각을 쌓는 프로그램이다." 선생님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원래는 위험 부담 때문에 전투형 스킬 학생들 위주로 조를 짜는데, 이번에 내가 특별히 요청했다. 너도 참여할 수 있게."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도요? 정말이세요?" 목소리가 커졌다. 옆자리에 있던 다른 선생님이 흠칫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그래. 대신 안전 요원이 항상 옆에 붙을 거고, 위험 판단이 되면 즉시 철수시킬 거다. 그 조건으로 겨우 허락받았어." 박 선생님의 표정에는 걱정과 기대가 반쯤 섞여 있었다. "교장님도 처음엔 반대하셨다. 함정 스킬로 뭘 하겠냐고. 그래도 내가 우겼어."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이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저학년 학생들이 보였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처지였거든."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선생님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의 눈가에 잠깐 스친 그림자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기회, 놓치지 마라." 선생님의 그 말이 며칠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밥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회라···.' 나에게 그런 단어가 붙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주말이 되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초급 던전 입구, 정식 명칭은 '한강 지하 3구역 던전'이었다. 낮은 등급의 던전이었지만, 실제 몬스터가 서식하는 진짜 던전이었다. 입구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계속 손끝을 매만졌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잘해야 해.' 입구 앞에는 탐색자 양성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다들 안전 장비를 착용하고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검을 몇 번이고 뽑아보고, 누군가는 방패를 손에 익히듯 문지르고 있었다. "강도윤이 여기 왜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재휘였다. 재휘 옆에는 다른 아이들 몇 명도 함께 있었다. "박 선생님이 특별히 허락해주셨어." "함정 스킬로? 여기 와서 뭐 하려고, 짐이나 될 텐데." 재휘가 코웃음을 쳤다. 주변 아이들도 킥킥거리며 웃었다. "쯧쯧, 위험한데 왜 데려오셨대." 누군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우리 조에 안 걸린 게 다행이지." 또 다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로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다시 폈다. "자, 다들 조 편성표 확인해라." 박 선생님이 명단을 나눠주며 말했다. 나는 안전 요원 한 명과 함께 별도 조로 편성됐다. 다른 학생들은 4~5명씩 묶여서 조를 이뤘지만, 나는 사실상 혼자였다. 안전 요원의 이름은 최민석이었다. 30대 중반의 남자로, 등급이 낮은 던전을 여러 번 경험한 베테랑이라고 소개받았다. 체격이 다부졌고, 허리에는 낡은 단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학생, 긴장하지 말고. 위험하면 바로 빼줄 테니까." 최민석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지만, 눈빛에는 나름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꾹 숙였다. "오, 인사성 밝네. 요즘 애들 안 이런데." 최민석이 피식 웃으며 앞장섰다. 던전 입구로 들어서자, 공기가 확 바뀌었다. 습하고 축축한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낮은 울음소리. 등불 몇 개만이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발밑에서는 물기 섞인 흙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쿠르릉···." 먼 곳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학생, 이 던전에는 주로 슬라임이나 저등급 고블린이 서식해. 위험도는 낮지만 조심해야 돼." 최민석이 설명하며 앞장섰다. "보통 처음 오는 학생들은 슬라임 보고도 놀라. 젤리처럼 생겨서 만만해 보이는데, 산성 점액이 있어서 맨손으로 만지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통로는 좁고 어두웠다. 벽을 짚어보니 차갑고 미끈거리는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통로를 따라 걷던 중, 저 앞쪽에서 다른 조가 고블린 무리와 마주친 소리가 들렸다. "챙-! 챙-!"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으아악!" 짧은 비명도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봤다.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괜찮아, 저쪽은 다른 안전 요원들이 붙어 있으니까." 최민석이 나를 안심시켰다. "저런 소리, 자주 들으세요?" "자주는 아니고, 신입들이 처음 던전 오면 꼭 한 번씩 저래. 놀라서 지르는 소리지, 실제로 크게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의 말투는 무덤덤했지만, 뭔가 안심이 됐다. 조금 더 걸어가자, 좁은 통로 앞에서 슬라임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초록빛 젤리 형태의 몬스터, 슬라임. 하급 던전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치는 몬스터였다. 움직임이 느릿느릿했고, 몸통이 흐물흐물 흔들릴 때마다 희미한 빛이 반사됐다. "학생, 시험해볼래? 저 정도면 큰 위험 없어." 최민석이 나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실전이었다. 여태까지 훈련장에서만 써봤던 함정을, 진짜 몬스터에게 처음으로 써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함정 설치." 슬라임이 지나갈 통로 바닥에 손끝을 겨눴다. 마력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가며 원형 문양이 새겨졌다. [함정 : 진창 트랩 설치 완료] 슬라임이 천천히 그 위로 다가왔다. 느릿느릿, 아무것도 모른 채 진창 위로 발을 들이밀었다. "철푸덕-" 순간 진창에 발이 닿은 슬라임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졌다. 젤리 몸이 진창에 반쯤 파묻히며 버둥거렸다. "됐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최민석이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야, 정확하게 잡혔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최민석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짜 궁금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곧바로 다음 함정을 설치했다. "함정 설치, 낙석 트랩." 진창에 갇혀 있는 슬라임 위로 낙석 문양이 나타났다. 마력이 조금 더 빠르게 소모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콰앙-!" 무거운 돌덩이가 슬라임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슬라임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지며 사라졌다. [슬라임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그 문구를 보며 숨을 헐떡였다. 처음이었다. 혼자서, 함정만으로 몬스터를 처치한 게. 훈련장 인형이 아니라, 진짜 살아 움직이는 몬스터를. "학생, 이거 진짜 대단한데." 최민석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함정 조합으로 몬스터를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는 거, 나도 처음 봐. 보통 함정 스킬은 하나 설치하는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두 개를 연달아 쓰는 거 봤어?" "어쩌다 보니···."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연습한 조합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이거 학교에다 제대로 보고해야겠는데." 최민석이 통신 장비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박태호 선생님이 준 이 기회가, 정말로 나에게 뭔가를 증명할 수 있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서서히 자라났다. '재휘, 봤어? 나도 할 수 있다고.'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자,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자. 이 정도 페이스면 예정보다 빨리 끝날 것 같은데." 최민석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손끝에 남은 마력의 여운을 느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훨씬 크고 낮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오오오오ㅡ" 최민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소리는... 하급 던전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가 통신 장비를 급히 손에 쥐었다. "본부, 여기 3구역 이상 개체 반응 있음. 즉시 확인 요청."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무덤덤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반응한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슬쩍 최민석을 쳐다봤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학생, 지금 당장 뒤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로 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흙먼지가 천장에서 부슬부슬 떨어졌다. 이 던전에, 있어서는 안 될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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