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화요일, 오전 2시 55분.
나는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가 습기를 먹어 눅눅했다.
몇 번이나 접었다 폈는지, 접힌 선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전날 밤 세운 계획을 머릿속으로 마지막 한 번 되짚었다.
창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기숙사 뒤편, 별빛조차 구름에 가려 흐릿했다.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이 몸의 심장은 튼튼했다.
강태산의 몸,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 어둠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균형감각.
하지만 그 안에서 계산하는 머리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이하늘의 기억, 이하늘의 지식.
팔십 년을 살고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나는 지금 이 몸을 빌려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창틀을 넘었다.
발끝이 먼저 바닥에 닿았고, 무게가 서서히 옮겨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기숙사 뒤편, 실습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자갈이 깔린 구간에서는 발바닥을 옆으로 눕혀 디뎠다.
강태산의 몸이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 몸의 기억을 그대로 따라갔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소리 없이 딛는 방법, 무게중심을 낮추는 방법, 그림자를 밟는 방법.
내가 배운 게 아니었다.
이 몸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내 머리로 판단하고, 이 몸이 그 판단보다 먼저 반응했다.
실습장을 크게 돌아, 창고 뒷길로 들어섰다.
창고는 낮고 길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 녹슨 자물쇠.
나는 자물쇠 앞에 멈춰 섰다.
숨을 한 번 뱉었다.
손끝이 정확했다.
철사를 구부려 넣고, 텀블러 안의 나사를 다루듯 정밀하게 움직였다.
한 번.
철컥, 소리가 아니라 미끄러지는 느낌.
두 번.
안쪽 걸쇠가 움직이는 감각.
세 번.
철컥.
문이 열렸다.
나는 문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웠다.
발끝으로 계단 높이를 재며 한 칸씩 내려갔다.
손전등을 켰다.
빛이 좁은 원을 그리며 계단 벽을 훑었다.
계단 끝에, 낡은 게이트가 있었다.
표면이 흐릿하게 빛나는 균열.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지점.
가까이 다가서자 피부에 정전기 같은 느낌이 스쳤다.
[비공개 게이트 - E등급]
[관리 소홀 상태]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관리 소홀.
누구도 이곳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두 번.
숨을 내쉬고.
세 번, 마지막으로 깊게.
오전 3시 2분.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빛이 흔들리고, 공기의 냄새가 바뀌고, 발밑의 감각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좁은 동굴이었다.
벽면에 낮은 마력 광석들이 박혀 있었다.
군데군데 옅은 청록색 빛이 감돌았다.
공기는 습하고,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똑.
똑.
똑.
세 번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손전등을 벽 쪽으로 향했다.
광석 하나를 뽑아 살폈다.
표면이 거칠고, 손안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력 함량이 낮았다.
하지만 이하늘의 지식으로 회로를 구성하면, 함량을 압축할 수 있었다.
낮은 등급의 자원을 높은 밀도로 바꾸는 방법.
지구에서는 배터리 효율을 계산하며 익힌 방식이었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광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전 3시 20분.
동굴 안쪽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끄으, 끄으.
하급 몬스터, 안개쥐였다.
덩치는 작았지만 무리를 이루면 위험했다.
이빨이 예리하고, 떼로 달려들면 상처가 깊어졌다.
나는 벽에 붙어 몸을 숨겼다.
숨을 죽였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한 마리가 지나갔다.
두 마리가 지나갔다.
세 마리째,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려졌다.
이내 안개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숨을 다시 내쉬었을 때, 목이 말랐다.
오전 3시 40분.
동굴 깊은 곳에서 작은 방을 발견했다.
방 중앙에 마정석 원석이 박혀 있었다.
등급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순도가 좋았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손전등 불빛 아래서 원석의 결을 살폈다.
이하늘의 눈으로는 데이터였다.
강태산의 손끝으로는 감각이었다.
두 가지가 겹쳐지자, 원석의 가치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원석을 캐냈다.
손안에서 원석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지금이었다.
나는 원석과 낡은 회로판, 갖고 있던 부품을 늘어놓았다.
바닥에 늘어놓은 부품들이 손전등 빛에 반사되어 흐릿하게 빛났다.
강태산의 손이 형태를 만들었다.
부품을 배치하는 손끝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이하늘의 머리가 회로를 계산했다.
전류의 흐름, 마력의 저항, 저장과 방출의 비율.
두 지식이 하나로 겹쳤다.
처음에는 어긋났다.
손이 만드는 형태와 머리가 계산하는 수치가 맞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세 번째 시도에서, 완전히 맞아떨어졌다.
마력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감각이었다.
그냥 흐르는 감각이었다.
피가 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완성된 것은 작은 등불이었다.
마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빛을 내는 구조.
단순했지만, 지금까지 이 세계에 없던 방식이었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은 마력을 그 자리에서 소모했다.
저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구의 배터리 개념과, 이 세계의 마력 회로를 겹쳐 만든 것이었다.
어느 쪽도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등불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숨이 멎었다.
됐다.
정말로 됐다.
[감지되지 않는 스킬이 발동했습니다]
상태창에 문구가 떠올랐다.
[스킬명: 융합 - 미분류]
[효과: 이종 지식 결합을 통한 물건 창조]
손끝이 저릿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였다.
이게 나에게 남은 것이었다.
죽고, 다시 태어나고, 낯선 몸에 갇혀서도 잃지 않은 것.
두 세계의 지식을 하나로 겹치는 힘.
웃음이 나왔다.
팔십 년 넘게 갈망하던 것을, 이 초라한 몸으로 처음 이뤄냈다.
지구에서 나는 늘 부족했다.
공학 지식은 있었지만 자본이 없었고, 자본이 조금 생기면 시간이 없었다.
시장은 나 같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여기서는 달랐다.
여기서는 내가 가진 지식 자체가, 시장에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등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빛이 손금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전 4시 10분.
나는 등불을 주머니에 넣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동굴의 습한 공기가 사라지고, 다시 지하 계단의 서늘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창고 계단을 올라, 자물쇠를 다시 걸었다.
한 번, 걸쇠를 맞추고.
두 번, 손끝으로 확인하고.
세 번, 문을 살짝 밀어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갈을 밟아도, 흙을 밟아도, 발끝이 땅에 닿는 감각이 이상하게 부드러웠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등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채웠다.
나는 그 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됐다.
정말로 됐다.
이 순간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모른다.
지구에서 밤을 새우며 도면을 그릴 때마다, 이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일지 그려봤다.
울 것 같았다.
웃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뭔가 허전했다.
손을 들어 가슴을 짚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평소와 다르지 않게.
하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뭔가가, 없는 것 같았다.
기쁨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쁨이 아니라 그냥 텅 빈 감각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꿈을 이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축하해줄 사람도, 함께 웃을 사람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게 이상하게 크게 느껴질까.
나는 등불을 다시 바라봤다.
빛은 여전히 은은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마룡과 싸우던 순간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태산의 마지막 순간, 그 필사적인 표정.
분명 조금 전까지도 선명했던 그 얼굴이, 지금은 흐릿했다.
떠올리려 할수록 형체가 무너졌다.
윤곽만 남고, 표정은 사라졌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도, 눈을 감으면 바로 보였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애를 써도 붙잡히지 않았다.
나는 등불의 빛을 응시했다.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의 온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손끝의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