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골 탐색자님, 믿어도 돼요?

3화

D급 습지 던전 입구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낡은 철문 하나, 그 옆에 붙은 협회 안내판이 전부였다. 녹슨 안내판에는 "습지 슬라임 서식 구간, 초심자 3인 이상 파티 권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권장이라... 저 문구 볼 때마다 불안한데.' 권장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최소 조건을 뜻하는 거였다. [입장 인원: 3명 확인] 게이트가 짧게 반응했다. "긴장되네요..." 은채가 지팡이를 꼭 쥐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있어서 더 불안해할 것 같은데.' 전투력 C-. 딱 봐도 든든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숫자였다. 그래도 표정은 자신감 있게 유지했다. 이런 건 분위기가 반이니까. * 던전 안은 습기로 가득했다. 첨벙거리는 발소리가 통로를 채웠다. 바닥은 발목까지 잠기는 얕은 물웅덩이였고, 벽에는 이끼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공기 중에 비 온 뒤 운동장 냄새 같은 게 났다. "저기, 셀 수 없이 많이 온다..." 해린이 걸음을 멈췄다. 습지 슬라임 무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숫자만 보면 초심자 셋이서 감당할 규모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젤리 매장 세일 현장 같았는데, 문제는 저게 다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거였다. [경고: 다수 몬스터 감지] 시스템이 뒤늦게 알려줬다. 아니, 이제 알려주면 뭐 어쩌라고. 이미 눈으로 다 보고 있는데 뒷북 치는 시스템이라니. "도윤 씨, 저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은채가 뒷걸음질치며 물었다. "도망칠 곳도 없어요. 통로가 하나뿐이잖아요." 나는 냉정하게 답했다. 사실이었다. 이 던전은 일자형 구조라 뒤로 빠져도 만나는 건 철문뿐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해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싸워야죠. 대신, 제가 도와줄게요."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버프 계수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는데.' 첫 실전에서 계수가 낮으면 답이 없었다. "해린 씨, 파이어볼 준비해요." 나는 빠르게 지시했다. "저 믿어요?" 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니요, 근데 지금 안 하면 다 죽어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이유면 믿을 수밖에 없네요." 그녀가 손을 들었다. 화륵. 작은 불씨가 손끝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대상: 강해린 (E-급) / 신뢰도: 상승 중 / 버프 계수: 0.31배] 오, 지난번보다 확실히 올랐다. 카페에서 함께 웃고 떠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거 완전 친밀도 게이지 시스템이잖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호감도 올리던 그 감각이랑 똑같았다. 다만 이건 실패하면 사람이 죽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콰과광! 불덩이가 슬라임 무리 한가운데서 터졌다. 예상보다 훨씬 큰 폭발이었다. 슬라임들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었다. "헐..." 해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제 마법이라고요?"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다행이다, 효과가 눈에 보이게 나왔다. 첫 스킬부터 헛발질했으면 신뢰도가 도로 떨어질 뻔했다. '좋아, 일단 시작은 성공적이다.' 남은 슬라임들이 우리를 향해 밀려들었다. 숫자는 줄었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은채 씨, 힐 준비하고 뒤로 빠져요!" 나는 소리쳤다. "네!" 그녀가 지팡이를 들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자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또 스킬을 발동했다. [대상: 서은채 (F급) / 신뢰도: 상승 중 / 버프 계수: 0.42배] 어제보다도, 카페에서보다도 계수가 확 뛰었다. '이 애, 신뢰 게이지 오르는 속도가 왜 이렇게 빠르지.' 숫자만 보면 나를 무슨 구세주로 아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반짝, 은채의 손에서 빛이 뿜어졌다. 힐 마법인데 회복이 아니라 방어막처럼 우리를 둘러쌌다. [초급 힐 마법 → 성역 결계로 변환] 처음 보는 문구였다. '이건 또 뭐야.' 버프 계수가 특정 구간을 넘으면 마법 자체의 형태가 바뀌는 모양이었다. 마치 게임에서 스킬 레벨이 일정 이상 오르면 상위 스킬로 진화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옛날에 하던 육성 게임에서 특정 조건 채우면 캐릭터가 각성하던 그 장면이 딱 떠올랐다. '설마 얘네도 조건 채우면 각성 컷신 나오는 거 아니겠지.' 슬라임들의 공격이 결계에 튕겨나갔다. "이게 뭐야, 이거 완전 사기잖아!" 해린이 소리쳤다. 동의한다. 나조차도 이 정도는 예상 못 했다. 방어막 하나가 파이어볼 폭발 반경 안에서도 우리를 멀쩡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게임 밸런스 조정 들어가야 하는 수준 아닌가 싶었다. [던전 심층부에서 이상 반응 감지]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뭐야, 또 뭐 나오는 거야. D급 던전에서 이상 반응이라는 단어가 뜨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습지 안개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슬라임보다 세 배는 큰, 던전 보스급 개체였다. [변종: 늪지의 폭군 개구리] 이름표가 붙었다. '저게 진짜 D급이라고?' 협회 게시판에 적힌 정보랑 확실히 달랐다. 게시판에는 그냥 "습지 슬라임 다수"라고만 적혀 있었지, 개구리 얘기는 한 줄도 없었다. 이런 걸 정보 누락이라고 하나, 아니면 그냥 협회가 게을렀던 건가. '나중에 항의 게시판이라도 찾아봐야겠다.' 물론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도윤 씨, 이거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은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는데, 일단 해봐야죠."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무책임한 대답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뒤로 물러날 곳도 없고, 협회에 지원 요청을 넣을 시간도 없었다. 이럴 때 정직한 대답이 오히려 신뢰를 쌓는다는 걸 나는 이미 두 번의 스킬 발동으로 배운 참이었다. 해린이 다시 파이어볼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에서 불꽃이 넘실거렸다. '벌써 스킬 운용이 익숙해진 건가.'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빨리 배운다.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스킬을 겹쳐 걸었다. 동시에 두 명한테 거는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됐다. [동시 대상 버프: 서은채, 강해린 / 계수 각각 0.38배, 0.35배] 숫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둘 다 처음보다 훨씬 높아진 수치였다. 짧은 시간 안에 함께 위기를 넘긴 게 신뢰로 쌓인 모양이었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였다.' 카페에서 몇 시간 수다 떤 것보다 던전에서 몇 분 같이 죽을 뻔한 게 신뢰도 상승엔 더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이거 완전 극한 상황 팀빌딩 아닌가. 콰가가강! 해린의 파이어볼이 개구리의 옆구리를 정확히 때렸다. 동시에 은채의 힐이 결계를 두 배로 넓히며 우리를 감쌌다. 개구리가 포효하며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물웅덩이를 사방으로 튀기며 요동쳤다. 첨벙, 콰당! 놈이 쓰러졌다. 정적이 흘렀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통로를 채웠다. [던전 클리어]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신기록 갱신: 12분 34초] 뒤이어 뜬 숫자를 보고 나는 숨을 멈췄다. 47분이 기존 기록이었는데, 우리는 그걸 4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에 밀어버렸다. "이게... 신기록이라고요?" 은채가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미친..." 해린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이거지.' 전투력 C-인 내가 직접 싸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이어볼 한 번 던진 적도 없고, 검을 뽑은 적도 없었다. 그냥 두 사람 뒤에서 계수를 뿌려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이게 바로 이 스킬의 진짜 얼굴이었다. 전투력으로 따지면 나는 이 파티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과만 보면 제일 큰 역할을 한 사람도 나였다. '이거 완전 아이러니한데.' 이런 걸 두고 매니저형 인재라고 하는 건가. "우리 완전 대박 아니에요?!" 은채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저 파이어볼로 D급 보스 잡았어요, 저요!" 해린도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둘이 서로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물웅덩이 위에서 첨벙첨벙 뛰는 두 사람 모습이 꼭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 같았다. 방금까지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이라기엔 너무 해맑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뭔가 뭉클해졌다. '이게 사람 키우는 재미인가.' 게임에서 캐릭터 육성할 때 느끼던 감정이랑 비슷했다. 다만 이번엔 진짜 사람이고, 진짜 목숨이 걸려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 무게감이 묘하게 뿌듯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 그런데 던전 출구로 나오자마자, 뭔가 이상했다. 협회 직원들이 몰려와 있었다.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신기록 갱신자가 여기 계시다고요?" 한 직원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스마트폰을 든 몇 명의 탐색자들이 우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저기, 방금 나온 분들이 신기록 파티 맞나요?" "인터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겹쳐 들려왔다. '어,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 정도 규모의 관심을 받을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D급 던전 신기록 하나로 이렇게까지 몰려올 일인가 싶었는데, 직원들 표정을 보니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훨씬 더 큰 게 걸려 있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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