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손끝의 빛이 점점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은백색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서 다른 색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짙은 남색과 옅은 보라색이 겹쳐지며 서로 삼키듯 흘러다니는, 그런 색이었다.
익숙한 색이었다.
이백 년 전, 지구에서 봤던 밤하늘의 색.
정확히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던 그 골목길에서, 가로등이 하나둘 꺼져가던 순간에 올려다봤던 하늘색이었다. 그 하늘 밑에서 나는 이상한 빛에 휩싸였고, 다음 순간 이 세계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백 년이 지난 지금, 그 색이 내 손끝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몸이 왜 그 색을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백 년이면 잊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인데, 몸은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엄마, 왜 그래요!"
도현이 창문을 넘어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이 층 높이인데 망설임도 없었다. 뒤이어 소민도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짝이 경첩째로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 저 문 값도 내가 물어줘야 하나, 이런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하다.
아린은 그 소란에 잠에서 깨 눈을 비비며 창가에 서 있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 애는 이 소동에 뛰어들지 않아서.
"[대장님, 진정하세요!]"
수린이 다급하게 물의 장막을 만들어 냉기를 다스리려 했다. 반투명한 물의 벽이 순식간에 마당 한쪽을 가로막았다. 평소라면 그 벽만으로도 어지간한 화기나 냉기는 걸러졌을 텐데, 내 몸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그 장막을 그대로 통과했다. 마치 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수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언디네가 자기 물이 무시당하는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봤다.
"이게... 뭐야."
내 목소리인데 낯설었다. 목구멍을 긁고 나온 소리가 아니라, 어디 다른 곳에서 울려서 여기까지 전달된 것 같은 소리였다.
머릿속으로 이백 년 전 기억들이 순서 없이 쏟아졌다.
교실 창문, 급식실 냄새, 친구들 웃음소리,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걷던 골목길, 편의점 앞에서 사 먹던 삼각김밥, 학원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 그리고 그날 밤 이상한 빛에 휩싸이던 순간까지.
그 기억들은 순서 없이 뒤섞여 밀려왔지만,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지워지지 않고 그저 어딘가에 눌러 담겨 있었을 뿐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 알게 됐다.
그 기억들이 지금, 마력의 형태로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도현, 소민, 뒤로 물러나!"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 혼자 두고 어떻게 물러나요!"
소민이 검을 뽑았다. 검신이 마당에 흐르는 은백색 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쩍였다. SS급이 된 지 며칠 만에 자기 엄마를 상대로 검을 쓸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나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지키려는 것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검으로 벨 수 있는 상대였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화린, 냉기를 태워버려!]"
풍린의 외침에 화린이 손바닥에서 불꽃을 만들어냈다. 새빨간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불꽃이 내 몸 근처에 닿기도 전에 스르륵 꺼져버렸다. 마치 산소가 사라진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냥 없어졌다.
"[안 돼요! 이건 그런 종류의 마력이 아니에요!]"
화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평소 능글맞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귓속에서 심장 박동이 그대로 울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코끝에서 뜨뜻미지근한 게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코피였다.
이백 년 만에 처음 흘리는 코피. 이백 년 동안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몬스터 웨이브도 몇 번씩 막아내던 몸이, 지금 이 순간 코피 한 방울에 무너지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엄마!"
도현이 나를 부축하려 다가왔다. 그 순간 내 손끝에서 뻗어나간 은백색 빛이 도현의 손을 살짝 스쳤다. 팟,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빛이 스파크처럼 튀었다.
도현이 짧게 신음을 뱉으며 손을 감쌌다.
"오빠!"
소민이 검을 놓칠 뻔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도현을 밀어내고 싶은데, 팔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굳어 있었다.
"괜찮아, 소민아. 그냥 좀 뜨거워서."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가운 것일 텐데, 도현은 애써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손등에 하얗게 서린 서리를 소매로 슬쩍 덮으면서. 그 서투른 거짓말이, 오히려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안 된다.
지금 이 아이들이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이 아이들을 지키려고 살아왔다. 던전 앞에 버려져 낯선 세계에서 서로를 지키려던 이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것도 나였고, 그 후로 지켜야 할 이유가 된 것도 이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가, 그걸 전부 뒤집으려 하고 있었다.
이건 배신이었다. 내 몸이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수린, 나한테서 다들 떨어뜨려."
"[대장님, 그럴 수 없어요! 지금 대장님 몸 상태가...]"
"명령이야."
이백 년 동안 이 아이들에게 명령이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었다. 부탁도 아니고 요청도 아니고, 명령.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린이 잠시 망설였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수린의 눈동자가 나와 도현, 소민, 아린을 차례로 훑었다. 그리고 결국 물의 벽을 만들어 도현과 소민, 아린을 뒤로 밀어냈다.
"엄마, 안 돼!"
소민이 물의 벽을 두드렸다. 퍽, 퍽, 소리가 났다. 하지만 언디네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벽은 SS급의 힘으로도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소민 님. 대장님 명령이라...]"
수린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여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벽을 사이에 두고 가장 괴로운 건 수린일지도 몰랐다. 나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지금 내리는 명령은 나를 지키지 말라는 명령이었으니까.
손끝의 빛이 이제는 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남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이 어깨까지 번져갔고, 그 빛이 스치는 자리마다 마당의 흙이 서리처럼 하얗게 얼어붙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머릿속에서 이백 년 전의 기억이 하나의 문장으로 응축되는 게 느껴졌다.
집에 가고 싶다.
단순한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이 내 안의 무언가와 공명하며 마력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어떻게 될지, 정령들이 아까 말한 그 마을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
그 마을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을까. 누군가의 그리움이, 누군가의 후회가 이렇게 빛으로 터져나가서,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워버렸을까.
"[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대장님 마력이 지구 쪽 균열이랑 공명하고 있어요!]"
화린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렸다. 균열이랑 공명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눈앞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풍린! 결계 하나 더!]"
"[이미 세 겹 쳤어! 더 쳐도 못 버텨!]"
정령들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다급하고, 날카롭고, 평소의 능글맞음 따위는 전부 사라진 목소리들이었다. 그 목소리들 사이로 도현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도 섞여 있었지만, 이제는 단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소리의 파편들만 귓속에서 울렸다.
마지막으로 본 건, 물의 벽 너머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도현과 소민의 모습이었다. 도현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고, 소민은 입을 벌린 채 뭔가 외치고 있었다. 아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당 전체를 뒤덮은 은백색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쩌엉, 하는 소리가 났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빛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마당의 나무들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고, 그 위로 눈처럼 잔가지가 부서져 내렸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딱 하나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애들 다치게 하지 마.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지워졌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마당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발밑의 감촉이 달랐다. 흙도 아니고 돌도 아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질적인 촉감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 냄새도 달랐다. 매캐하면서도 서늘한,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서였는지 떠오르지 않는 냄새.
도현도, 소민도, 아린도, 수린도, 화린도, 풍린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식은땀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