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00살 마녀는 엄마다

3화

촛불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엔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 소민이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리는 걸 감추려 무릎 위에 올려놨다. "괜찮아. 그냥 좀 놀라서."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이백이십 년 동안 지구라는 단어는 봉인해둔 상자 같았다. 열면 안 되는 상자, 열어봤자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상자. 그런데 그 상자가 도현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마치 오늘 저녁 반찬이 뭐냐고 묻는 투로. "자세히 얘기해봐. 그 던전, 정확히 어떤 던전이었는데?"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나온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취소해야 했다. 끝이 살짝 갈라졌다. 도현이 옆에 있던 서류철을 꺼냈다. 미리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하여간 저 녀석은 뭘 하든 준비성이 지나치게 철저하다. 누굴 닮았는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칼두안 왕국 북쪽 삼림지대에 있는 던전이었어요. 원래는 C급 던전이었는데, 며칠 전부터 게이트 색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대요. 조사반이 들어갔다가 안에서 지구 쪽 좌표로 이어지는 균열을 발견했고요." "균열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형태야?" "거울처럼 생겼는데, 들여다보면 다른 풍경이 보여요. 저희가 확인한 건 아파트 건물 같은 게 보였다는 거예요." 아파트.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목이 메었다. 이백이십 년 전 내가 살던 동네에도 아파트가 있었다. 낡은 5층짜리 회색 건물이었는데, 창문마다 다른 커튼 색을 걸어놓은 게 기억났다. 3층 베란다에는 늘 빨간 고무장갑이 널려 있었고, 502호는 밤마다 개가 짖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이백 년이나 묵어서도 이렇게 선명한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됐다. "그 아파트, 몇 층짜리였는지 혹시 봤어?" 말이 먼저 튀어나가고 나서야 내가 뭘 물은 건지 깨달았다. 도현이 서류철을 뒤적이다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순간적으로 보인 거라.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하다는 걸 들키면 안 됐다. 궁금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 세계에서 이백이십 년을 산 사람이고, 지구는 나에게 남이나 다름없어야 했다. 그렇게 정리해두고 살아왔는데, 아파트 한 단어에 이 모든 정리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길드 쪽에서는 뭐래?" "일단 조사 중이라고만 발표했어요. 근데 저희끼리 얘기로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어요. 몇 달 전부터 비슷한 게이트가 여기저기서 발견됐는데, 왕국이 다 막고 있었다고." 왕국이 정보를 막고 있었다는 얘기에 소민이 발끈했다. "그게 말이 돼?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근데 우리도 이번에 우연히 알게 된 거야. 만약 우리가 그 던전을 안 잡았으면 아마 계속 몰랐겠지." "왕국이 왜 숨기는데? 뭐 좋은 게 있다고." "글쎄, 혼란 방지 아닐까. 아니면 자기들이 먼저 뭘 해보려는 거거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손끝의 냉기가 점점 위로 올라오는 걸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상했다. 나는 SSS급이다. 어떤 위협 앞에서도 이렇게 몸이 반응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냥 단어 몇 개에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혼자 막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계산만 하면 됐으니까. 이건 계산이 안 되는 종류의 흔들림이었다. "[대장님.]" 수린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령들을 봤다. 화린도, 풍린도, 토린도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백 년을 함께했지만 이런 얼굴은 처음 봤다. 저것들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혹시 대장님, 예전에... 그 얘기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 얘기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눈짓으로 수린을 말렸다. 지금은 그 얘기를 할 자리가 아니었다. '대장님, 지금 표정 완전 티 나요.' 수린이 내면으로 슬쩍 말을 걸어왔다. 능글맞은 말투는 여전한데, 그 밑에 깔린 긴장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히 해.' '알겠어요, 알겠어요. 근데 이거 진짜 큰일일 수도 있어요. 균열이 지구로 이어졌다는 거, 이게 우연이 아닐 수도...' '조용히 하라니까.' 수린이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입이 없으니 발화를 멈췄다는 게 맞겠지만, 어쨌든 조용해졌다. "엄마, 무슨 얘기요?" 도현이 눈치가 빨랐다. 항상 그랬다. 어릴 때부터 내 표정만 보고도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저 눈치는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나는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오늘은 너희 승급 축하하는 날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파티 분위기는 다 깨져 있었다. 촛불 아래 늘어놓은 케이크도, 애써 구운 스튜도 다 김이 빠진 느낌이었다. 아린만이 상황을 모른 채 스튜 그릇을 싹싹 비우고 있었다. 저 나이 때는 저래도 된다. 세상이 흔들려도 밥은 맛있으니까. "엄마, 근데 던전이 지구랑 연결됐다는 거, 그럼 사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소민의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근데 아직 안전성이 검증 안 됐대. 균열이 불안정해서 잘못 들어가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진짜 위험한 거네." "그렇지. 그래서 왕국도 함부로 발표 못 하는 걸지도 몰라. 잘못 알려지면 사람들이 몰려가려고 할 테니까." 몰려간다. 그 말이 이상하게 아프게 들렸다. 몰려갈 만큼 그리운 곳이 있다는 게, 나에겐 이미 지나간 사치였다. 아니, 사치가 아니라 애초에 선택지에 없던 것이었다. 이백이십 년 전, 나는 돌아갈 방법도 몰랐고 돌아갈 곳이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다른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그리움이었다. 이백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로 느껴본 그리움. 그 감정이 너무 낯설어서, 나는 잠시 내가 누구인지도 헛갈렸다. 여기 앉아 있는 게 세 아이의 엄마인지, 아니면 이백 년 전 그 아파트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껍데기뿐인 유령인지. "엄마, 얼굴이 왜 그래요? 진짜 안 괜찮아 보이는데."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지만, 손이 떨리는 걸 도현이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저 녀석 눈은 정말이지 못 속인다. "진짜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하얘졌는데." 소민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기울였다. 셋 중에 제일 표현이 솔직한 애다. "엄마 스튜 더 줄까요?" 아린이 뭘 알아서 물은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더 먹고 싶어서 핑계 삼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무심한 질문이 오히려 숨통을 트여줬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됐어. 너 먹어." "진짜요?" "그래, 진짜." 아린이 신나서 스튜 그릇을 자기 앞으로 끌어갔다. 저 단순함이 지금 이 순간엔 고마웠다. 창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마당의 텃밭 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슬라임이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확인하러 나갔다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았다. "[대장님, 진짜 얘기 안 하실 거예요? 애들도 이제 다 컸는데.]" 화린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평소 같으면 눈치 없이 아무 말이나 던지는 쪽인데, 오늘따라 목소리가 낮고 신중했다. '지금은 아니야.' '그럼 언제요? 이 균열이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없었다. 언제가 좋을지, 나 자신도 답을 몰랐다. 이백이십 년 동안 미뤄온 이야기를, 이제 와서 언제 꺼내야 적당한지 누가 정해줄 수 있을까. "괜찮아. 정말 괜찮아."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반복할수록 거짓말처럼 들렸다. 도현의 눈이 가늘어지는 걸 봤다. 저 녀석은 이미 다 눈치챈 눈빛이었다. 마당 쪽 부스럭거림이 점점 커졌다. 슬라임이 아니었다. 발소리였다. 사람의 발소리, 아니 사람의 것치고는 너무 일정하고 무거운 발소리. 정령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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