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둬놓고 이제 지키라니

1화

지리산 깊은 골짜기, 인적조차 드문 그 안쪽에 자리한 오두막 한 채는 낮에도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사방을 에워싼 노송들이 하늘을 가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선우결은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을 떠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호흡을 반복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새벽의 산 공기는 유독 무거웠는데,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골짜기 아래로 이슬이 나뭇잎마다 매달려 있다가 바람 한 줄기에도 힘없이 떨어져 내렸고, 그 소리마저 고요함 속에서는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다. 투욱, 투욱··· 이슬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선우결은 좌선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미세한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 열기가 혈맥을 따라 퍼져나가며 손끝까지 도달하는 감각은 이제 익숙한 것이 되어 있었다. 열일곱, 금빛으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눈매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차분했으며,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뇌전을 닮은 황금빛 영력이 미약하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그 빛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스승도 없이, 책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 부딪혀 얻어낸 감각만으로 매일의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겠지.' 좌선을 풀고 일어난 그는 관절 몇 군데가 뻐근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가볍게 풀었고, 오두막 뒤편의 좁은 공터로 나가 늘 하던 대로 기둥처럼 박힌 고목을 향해 손끝을 뻗었는데, 이 고목은 그가 이곳에 온 첫해부터 표적이 되어 온 것으로, 이제는 껍질 곳곳이 그슬린 흔적으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옅은 금빛 기류가 나무껍질을 스치고 지나가며 파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파지지직··· 그 소리에 나무 표면이 순식간에 검게 그슬렸다가, 이내 힘이 사그라들며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짧게 숨을 몰아쉬며 손목을 털었는데, 이 정도의 위력조차 자신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을 뿐, 그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것인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번 더. 두 번 더. 그는 같은 동작을 몇 차례나 반복했는데, 매번 기류의 굵기와 속도를 조금씩 바꿔보며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의 미묘한 차이를 몸으로 새기려 애썼고, 그 와중에 문득 나뭇잎 하나가 기류에 휩쓸려 재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며 짧게 눈살을 찌푸렸다. '좀 더 가늘게, 좀 더 정교하게 뽑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이, 그저 감각과 감각이 부딪히는 실패의 연속 속에서 그는 아주 조금씩,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그 느린 걸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조차 스스로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지겨움과 무료함 사이를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선우결이 이곳에 갇혀 살게 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흘렀는데, 어머니 백서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끝내 이 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시작은 열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 백서연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였고, 그보다 훨씬 앞서 선우결이 두 살이었을 무렵, 아버지 선우강은 훗날 구미호 사건이라 불리게 되는 참극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입을 통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유독 말을 아꼈는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자세한 정황이나 구미호 사건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채, 그저 "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다"는 말만을 반복했을 뿐이었고, 선우결은 그 침묵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감히 더 캐묻지는 못했었다. 아버지가 죽고 당주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외숙부 선우태랑이었다. 그는 형의 세력을 하나씩 정리했고, 선우결 역시 서자라는 이유로 오래전부터 이 산속에서 사실상 유폐된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매일 같은 산자락을 바라보며 살아왔고, 감시하듯 둘러쳐진 결계와 인공적으로 조성된 지형 때문에 산을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에 무의미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한 번, 그는 산 아래쪽으로 무작정 걸어 내려가 본 적이 있었는데, 반나절을 꼬박 걸었음에도 다시 오두막 앞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그 서늘한 절망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산 자체가 하나의 감옥인 셈이지.' 그 뒤로는 굳이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는데, 발버둥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한 이상, 남은 힘은 차라리 스스로를 단련하는 데 쓰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균열이자 위안은, 정기적으로 몰래 찾아오는 한 소녀였다. "오라버니!"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즈음, 숲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뛰어온 선우다인이 오두막 마당으로 뛰어들며 밝게 외쳤는데, 열세 살 소녀의 얼굴에는 이곳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조금의 그늘도 없이 환했다. "또 몰래 온 거냐." 선우결이 낮게 던진 말에 다인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품속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 들었고, 그 안에는 주방에서 몰래 훔쳐 온 듯한 주먹밥 몇 덩이가 담겨 있었는데,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은 것을 보면 이곳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서둘러 뛰어왔는지 짐작이 갔다. "형제들한테는 오라버니 괴롭히러 간다고 했으니까 아무도 안 의심해요." 능청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선우결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 한숨에는 짜증보다는 옅은 안도가 섞여 있었는데, 이 소녀만이 이 산속에서 그를 서자가 아닌 오라버니로, 감금된 자가 아닌 그저 결이라는 사람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냐." "안 들켜요. 저 이제 그 길 눈 감고도 찾아올 수 있다니까요." 다인은 자신 있게 대답하며 주먹밥 하나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는데, 선우결은 못 이기는 척 그것을 받아 한입 베어 물었고, 짠맛과 고소함이 뒤섞인 그 평범한 맛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다인은 마당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가문의 형제들 중 하나가 스승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 최근 들어온 새로운 시녀가 유독 실수가 많다는 이야기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고, 선우결은 그저 묵묵히 들으며 가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러다 다인은 자연스럽게 어머니 백서연의 이야기를 꺼냈고, 자신이 어릴 적 백서연에게서 받은 애정이 얼마나 컸는지, 그 손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조잘조잘 늘어놓았는데, 선우결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목이 메어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오라버니, 큰어머니가 저 안아줄 때마다 꼭 오라버니 냄새가 났었어요. 이상하죠?" 다인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선우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목 쪽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그 나무의 그슬린 흔적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이 모습을 뭐라고 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스칠 때마다 그는 애써 감정을 눌러 담았고, 다인은 그런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은 채 그저 곁에 머물러 있어 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없는 침묵이 흘렀는데,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굳이 말을 채워 넣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는요, 여기서 이렇게 계속 지내는 거 답답하지 않아요?" 다인이 문득 던진 질문에 선우결은 잠시 침묵했다가, 짧게 대답했다. "답답해도 별수 없지 않느냐." "그래도··· 언젠가는 이곳을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당돌하게 말하는 다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는데, 선우결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고, 다인은 그것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결국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다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는데, 너무 오래 지체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되기 때문이었고, 그녀는 돌아가는 발걸음을 아쉬워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숲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조심히 가라." 멀어지는 등을 향해 선우결이 낮게 중얼거렸는데, 다인은 그 말을 들었는지 어깨너머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내 나무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인이 사라진 후, 오두막 주위는 다시 원래의 정적으로 돌아왔고, 선우결은 마당에 홀로 남아 저물어가는 하늘빛을 바라보며 오늘의 수련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짙은 주황빛에서 붉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며, 그 색의 변화를 무심히 눈에 담던 그는 문득 오늘 하루의 성과를 되짚어보려 했는데, 그 생각의 흐름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감각이 먼저 그를 붙잡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울어대던 산새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다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고, 다만 그 침묵이 시작된 이후로 숲 전체가 마치 숨을 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스산한 침묵. 숲 전체가 숨을 죽인 듯한 그 정적 속에서, 선우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를 응시했는데, 그 순간 그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누군가 있다.' 확신에 가까운 그 직감과 함께,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오두막 벽에 등을 붙였고, 그 짧은 순간에도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조여드는 듯한 기척이 겹겹이 감지되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무언가가 어둠 속 나무들 뒤에 몸을 숨긴 채 오두막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기척들은 하나같이 숨소리조차 죽인 채 지독하게 조심스러운 움직임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산에는 나 말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결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에서는 저절로 옅은 금빛 기류가 스며 나오며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파직··· 그 미약한 소리마저 이 지독한 정적 속에서는 유독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고, 선우결은 숨을 죽인 채 어둠 저편에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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