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택 뒤뜰에서 도훈과 마주친 건 그날 저녁이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하늘이 붉다 못해 거의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던 그 애매한 시각에, 나는 그저 바람이나 쐴 겸 뒤뜰로 나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대나무 숲 사이로 걸어들어온 도훈이 이미 검을 뽑아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훈은 청현 어르신의 친자이자 내 의제라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열대여섯 살 특유의 성마름을 그대로 검에 담아 나를 향해 겨눈 채 서 있었다. 그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즉흥적으로 벌인 시비가 아니라, 오래 벼르고 벼른 끝에 나온 결과라는 걸.
"형님, 오늘은 피할 생각 마십시오" 하고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는 그 말투에서 이미 여러 번 도전을 거절당한 자의 원한이 배어 있다는 걸 느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도훈과 검을 맞댄 적이 없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 몸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회귀 이전, 원래의 시간선에서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구나, 원래대로라면 나는 계속 이 도전을 피해왔던 거구나.'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검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도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딱히 나답지 않은 선택은 아니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굳이 어린 동생 앞에서 검을 뽑아 우열을 가리는 일 자체를 피곤하게 여겼을 게 뻔했으니까.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은 회귀 전이나 후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언젠가 다시 붉은 검 앞에 서야 했고, 그때 살아남으려면 내 검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미리 알아야 했다. 요컨대 이건 도훈과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내 목숨을 건 예행연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좋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도훈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형님이 이렇게 순순히 응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몇 번이나 거절당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채앙!
검과 검이 맞부딪는 소리가 뒤뜰의 대나무 숲을 갈랐고, 도훈은 곧바로 연달아 세 번의 찌르기를 쏟아냈다. 속도가 제법이었다. 열다섯 소년의 팔이라기엔 어깨에서부터 검 끝까지 이어지는 힘의 전달이 매끄러웠고, 세 번째 찌르기에 이르러서는 손목을 미묘하게 꺾어 궤도를 비트는 잔재주까지 섞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배운 검이었다.
예전이라면 나는 그것을 대충 흘려보내며 적당히 물러났을 것이다. 이겨봐야 얻는 게 없고, 져줘봐야 손해 볼 것도 없는 싸움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첫 번째 찌르기를 검신으로 밀어내고, 두 번째는 반보 물러나 피하고, 세 번째는 아예 검을 맞부딪치는 대신 손목을 살짝 틀어 도훈의 검을 흘려보냈는데, 그 순간 도훈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채 허공을 찌른 검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고, 그의 발끝이 진흙 바닥에 미끄러지며 짧게 끽 소리를 냈다.
"...뭐야, 이거" 하고 도훈이 헛숨을 내뱉으며 뒷걸음질쳤다.
나 역시 조금 놀랐다. 내 몸이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전에는 몰랐으니까. 손목을 트는 각도, 검신을 밀어내는 힘의 세기, 반보 물러나는 발의 위치까지, 머리로 계산해서 낸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몸속에 원래 있던 감각이 새로 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몸은 회귀 전, 붉은 검과 수없이 맞부딪쳤던 몸이었다. 그 경험이 기억으로는 흐릿해졌어도, 근육과 반사신경 어딘가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각은 내가 새로 얻은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다시 찾은 것에 가까웠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오히려 반가운 쪽이었다.
"한 번 더" 하고 도훈이 이를 갈며 다시 검을 들었다.
나는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다시 검이 맞부딪쳤고, 이번에는 도훈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발을 짧게 끌며 거리를 재고, 검을 낮게 눕혀 궤도를 숨기려 했는데, 그 잔재주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그작, 하는 소리와 함께 도훈의 검이 내 검에 밀려 튕겨 나갔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멈춰 섰다. 손목이 얼얼한 듯 그가 검을 쥔 손을 몇 번 털었다.
나는 검을 거두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 손을 무시하고 스스로 일어섰다.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님은... 항상 이 정도였습니까" 하고 그가 씹어뱉듯 물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그냥 웃었다. "글쎄, 나도 오늘 처음 알았다" 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오늘 처음 '되짚어' 안 것이었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도훈에게 설명해줄 이유는 없었다.
도훈은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검을 거두고 흙 묻은 옷자락을 대충 털어냈다. "다음에도 받아주십시오" 하는 말을 남기고 그가 돌아섰는데, 그 뒷모습에서 원한보다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갈증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형이라는 사람에게 계속 무시당해온 게 아니라, 계속 진지하게 상대해주지 않는 것에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나쁘지 않은 방향이었다. 도훈이 나를 더 진지하게 봐줄수록, 나중에 뭔가 도움을 청할 때도 수월해질 테니까. ...계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사람 하나하나의 호의는 아껴 쓸 여유가 없는 자원이었다.
그 광경을 담장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설아였다. 그녀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조용히 서 있었는데, 내가 시선을 돌리자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 걸음이 유난히 빨랐다. 뛰는 것보다야 느렸지만, 걷는 것보다는 확실히 빨랐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지금 붙잡는다고 해서 그녀가 걸음을 멈출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무슨 말로 붙잡아야 할지도 몰랐다. "왜 숨어서 봤어" 하는 것도 이상했고, "뭘 봤길래 그렇게 빨리 가"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보내는 게 서로에게 편했다.
*
그날 저녁, 나는 방으로 돌아가려다 부엌 옆 툇마루에 놓인 소반 하나를 발견했다. 국 한 그릇과 나물 반찬이 단정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소반 옆에는 아무 쪽지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 집에서 이런 식으로, 말없이 음식을 챙겨두고 사라지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소반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면서, 나는 아까 담장 너머로 사라졌던 그녀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 걸음의 속도와, 지금 이 소반에 담긴 정성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잠깐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국을 한 입 떠먹으니 간이 조금 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금을 평소보다 한 줌 더 넣은 듯한 맛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완벽하지 않다는 게, 그러니까 신경써서 만들다가 실수했다는 게 오히려 그 사람의 진심을 보여주는 증거 같았으니까. 평소라면 간이 딱 맞았을 사람이 오늘만 손이 흔들렸다면, 그건 분명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챙겨주면서 왜 얼굴은 그렇게 차갑게 보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질문을 입 밖에 낼 생각이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게 뻔했고, 무엇보다 지금 나에게 급한 건 그런 감정싸움이 아니라 붉은 검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이었으니까. 나물을 씹으며 나는 다시 뒤뜰에서의 감각을 되짚어보았다. 손목을 트는 순간의 그 미묘한 저항감, 검신을 미는 힘의 세기, 그 모든 게 몸에 남아 있던 기억이라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걸 '되짚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 지금의 이 몸이 겉보기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국그릇을 비우고 나서, 나는 소반을 그대로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거지는 내일 아침에 하인이 치울 테고, 굳이 내가 그릇을 부엌까지 가져다 놓아봐야 그녀가 알아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잠깐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이미 잠들었거나, 아니면 잠든 척을 하고 있거나.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청현 어르신의 서재에서 불빛이 새벽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걸 보았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이었다. 어르신이 밤늦게까지 서류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어딘가 달랐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몇 번이나 흔들렸는데, 그것은 촛불의 흔들림이라기보다는 누군가 그 앞을 계속 서성이고 있다는 증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서성임의 리듬이, 어딘가 낯익었다. 마치 붉은 검을 마주하기 전, 내가 항상 취했던 그 걸음걸이와 비슷했다.
나는 그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르신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문제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서재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 밤이,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