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버지, 또 죽이실 건가요?

1화

동해의 물빛은 원래 이렇게 붉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홉 척의 함대가 헌원제의 순행을 위해 동해로 나선 지 열흘째 되던 밤이었다. 순행이라고 해봐야 명목상으로는 해신께 제를 올리고 어업의 풍요를 기원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황실의 위세를 바닷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차에 가까웠고, 나는 그런 정치적인 계산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청현 어르신이 시키니까, 그리고 그 순행길에 설아가 동행한다고 하니까 따라나선 것뿐이었다. 그날 밤도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갈 예정이었다. 파도는 잔잔했고, 갑판 위 등불은 은은했으며, 나는 난간에 기대 별자리나 헤아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갑자기 먹지처럼 어두워졌다. 별빛이 지워지듯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는데, 그 직감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도 아래서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고, 그것이 새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갑판 위의 절반이 무너져 있었다. 날개를 펼치면 함대 세 척을 한꺼번에 가릴 만큼 거대한 조류였고, 깃털 하나하나가 검은 강철처럼 번쩍였으며, 그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짐승의 울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람의 흐느낌에 가까웠다.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는데, 짐승의 소리라면 그렇게 사람의 애원처럼 들릴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짐승이라면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 저건 뭔가를 원하고 있는 눈이었다. 굶주림이나 분노와는 다른,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갈망 같은 것이 그 새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고 있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저 새가 사람이었던 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도현! 뒤로 빠져라!" 하고 청현 어르신이 소리쳤지만, 나는 이미 검을 뽑아 든 채 갑판 중앙에 서 있었다. 나는 검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술 실력이 남들보다 나은 편이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그것을 자랑삼아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검을 쥐는 것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검을 쥐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건 대개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계산할 틈도 없이 다리가 갑판을 박차고, 손이 검자루를 쥐고,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답지 않은 반응이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순간엔 그런 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함대 위로 쏟아지는 술사들의 부적과 뇌기(雷氣)가 조류의 몸통을 때렸지만 깃털에 튕겨 나가기만 했고, 병사들은 갑판이 갈라지는 소리에 파도로 쓸려 나갔으며,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발을 내디뎠다. 부적이 타는 냄새와 짠 바닷물 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풍기는 피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는데, 그 냄새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감각이 이상하게도 선명해서, 나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콰아앙!! 조류의 발톱이 선체 하나를 통째로 찢었고, 나는 그 파편을 피해 몸을 굴리면서도 시야 한쪽에 붙박인 듯 서 있는 인영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붉은 옷을 입은, 아니, 붉은 검을 든 형체였다.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흐릿했는데, 그 손에 들린 검만은 선명했다. 핏빛으로 빛나는, 칼날 자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검이었다. 그 검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숨이 턱 막혔는데, 마치 그 검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서였다. '저건 뭐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여전히 비명이 끊이지 않았고, 갑판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며, 배 전체가 기울어지는 감각까지 느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헌원제 폐하를 배로!" 라는 외침이 들렸고, 나는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 방향에 설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아는 황실 호위의 일원으로 이 순행에 동행했고, 그 임무상 폐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그러니 폐하가 있는 곳이라면 설아도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발을 재게 놀렸는데, 그 순간 붉은 형체가 눈앞에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언제 거리를 좁혔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거리를 재기도 전에 이미 검이 내 쪽으로 뻗어 있었으니, 피할 수 있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아니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퍼억. 가슴을 파고드는 감각이 이상하게도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웠다. 몸속에 얼음을 통째로 박아 넣은 듯한 느낌이었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아니라 다리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피가 갑판 위로 번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투둑, 투두둑, 하는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걸 보면 필시 출혈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상하게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 정도 소리면 얼마나 흘렀을까.'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사람이 죽음 앞에서 반드시 비장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배운 셈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붉은 형체를 보려 했지만 이미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형체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핏빛 검날만이 눈앞에서 흔들리듯 남아 있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허탈함이 더 컸다. 이렇게 별것 아닌 순행 길에서, 이름도 모르는 상대에게, 이유도 모른 채 죽는다는 게 뭔가 억울하다기보다는 그냥 허무했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마지막으로 설아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설아. 채영이 죽고 난 뒤로 나를 볼 때마다 눈빛이 차가워졌던 그 사람. 채영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설아는 나를 보면 웃어주곤 했었는데, 채영이 죽고 나서부터는 그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를 볼 때의 그 시선에는 원망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저 슬픔이 굳어버린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냉담함 뒤에 뭔가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런 걸 붙잡고 있는 나 자신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사람이 죽기 직전에 떠올리는 게 대단한 깨달음이나 후회가 아니라 그저 좋아했던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도, 그 순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도현아!!" 하고 청현 어르신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고 멀었다. 나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고, 눈앞이 완전히 하얗게 뒤덮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은 등에 닿는 갑판의 차가움과, 어디선가 계속되는 비명 소리, 그리고 파도가 배를 때리는 진동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이었다. 나무 서까래에 걸린 등롱,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 이불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 어릴 때부터 맡아온 냄새라서 그게 무슨 냄새인지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그게 내 방 냄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분명히 동해의 갑판 위에서 죽었는데, 지금 나는 도성의 내 방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상처가 없었다. 피도, 통증도, 그 차가운 감각도 없었다. 옷섶을 풀어 확인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살갗은 멀쩡했고, 흉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아침 특유의 서늘한 공기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분명히 죽었는데.' 나는 몇 번이나 그 생각을 되풀이했다. 죽음의 감각이라는 게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착각일 리가 없었다. 검이 파고들던 그 차가움, 피가 번지던 그 소리, 청현 어르신의 목소리가 멀어지던 그 순간까지, 전부 지나치게 생생해서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지스러웠다. 나는 검에 찔렸고, 피를 흘렸고, 청현 어르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며 의식을 놓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살아 있었다. 손끝을 움직여보고, 발끝을 움직여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봐도 전부 정상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상이라서 더 이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까지도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 쪽을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역시 아무 상처도 없었다. 창밖으로는 익숙한 도성의 새벽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닭 우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모든 게 너무나 평온해서, 나는 오히려 그 평온함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게 정상은 아닐 텐데,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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