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 너머의 눈

5화

다음 날 오전 10시, '작은 균열' 입구.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나는 이미 세 번이나 마스크 위치를 고쳐 썼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내 눈으로 확인하고 끝낼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실제로 방송 카메라 앞에 서게 될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새벽별은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방송용 헬멧을 벗은 그녀의 얼굴은 화면보다 앳돼 보였고, 등에는 방송용 카메라 두 대가 나란히 장착된 백팩이 매여 있었다. 저 작은 몸으로 저 무게를 매고 다닌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실물로 뵈니 반갑네요!" 그녀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도현입니다." "오, 목소리 좋으시네요. 그럼 바로 들어가볼까요? 저 오늘 방송 켜도 되죠?" 그녀가 카메라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정체가 알려지는 게 두려웠지만, 어차피 이 검증 자체가 확신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최악의 스펙, 최악의 운을 가진 남자가 벽 너머를 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지, 그걸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다. "네, 켜셔도 돼요." 방송이 시작되자 새벽별의 시청자 수가 순식간에 300명을 넘어섰다. 그녀의 채널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다. 숫자가 올라가는 걸 보는데 명치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시청자] 새벽별 오늘 콜라보? [시청자] 저 사람 누구임 [시청자] 얼굴 안 보이네 [시청자] 마스크 왜씀 범죄자냐 나는 얼굴이 나오지 않게 모자와 마스크를 단단히 챙겨 왔다. 아직 정체를 드러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첫 번째 실험은 단순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새벽별이 반대편에서 무작위로 물건을 들고 서 있고, 내가 그것을 맞추는 것. "그럼 저 벽 뒤로 갈게요! 아무거나 골라서 들고 있을 거예요." 새벽별이 씩씩하게 걸어가며 소리쳤다. 나는 벽을 향해 손을 뻗고 정신을 집중했다. 지난번처럼 극한의 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스킬이 발동될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만약 여기서 아무것도 안 보이면, 나는 그냥 정신병자에 미친놈으로 남는 거였다.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 한구석에 회색 윤곽선이 떠올랐다. 벽 너머에 서 있는 새벽별의 형체,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의 형태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검이에요. 오른손에 들고 있어요."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벽 반대편에서 새벽별의 목소리가 터졌다. "헐, 진짜예요?!" 그녀가 벽을 돌아 나오며 정말로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검을 들었다 놨다 몇 번을 반복했다. [시청자] 뭐야 이거 실화냐 [시청자] 벽투시 스킬임?? [시청자] 저런 스킬이 있음? [시청자] 각본 아니냐 ㅋㅋ [시청자] 저도 저거 처음보는 스킬인데 채팅창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낌과 동시에, 이상한 피로감도 함께 느꼈다. 미세한 두통이 관자놀이 쪽에서 시작됐다. 이게 무슨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냥 긴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실험. 새벽별이 던전 안쪽에서 좀비 인형을 세워두고, 내가 그 위치를 맞추는 것. 이번엔 조금 더 먼 거리, 두 개의 벽을 사이에 두고 진행됐다. "이건 좀 더 어려울 텐데." 새벽별이 인형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나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벽 하나랑 벽 두 개는 다르다. 거리가 늘어난 만큼 발동이 안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결국 좀비 인형의 형체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왼쪽 벽 뒤, 구석에 있어요." 새벽별이 확인하러 갔다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맞아요! 진짜 맞아요!!" 그녀가 인형을 들어 올리며 카메라를 향해 흔들었다. [시청자] 와 이거 대박인데 [시청자] 저 사람 누구냐고요 [시청자] 새벽별 저 사람 소개 좀 [시청자] 랭커임? 어느 길드 [시청자] 마스크 벗어라 얼굴 좀 보자 세 번째, 네 번째 실험까지 연달아 성공했다. 세 번째는 던전 갈림길 두 곳 중 어느 쪽에 함정이 있는지 맞추는 거였고, 네 번째는 좀 더 짓궂게, 새벽별이 아예 다른 방으로 넘어가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는 걸 내가 맞추는 것이었다. "손가락 세 개요." 내가 말하자 새벽별이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미친, 미친, 진짜 세 개 폈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실험이 반복될수록 나는 확신을 얻었지만, 동시에 몸의 이상 신호도 점점 뚜렷해졌다. 관자놀이의 두통은 어느새 뒤통수까지 번졌고, 손끝이 살짝 저릿한 감각도 느껴졌다. 눈앞이 아주 잠깐씩 흐려지는 것도 같았다.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제 그만할까요?" 새벽별이 내 얼굴빛을 보고 물었다. "저 지금 표정이 완전 안 좋으세요. 무슨 장례식장 상주 같아요."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확실히 확인해야 해서요." 마지막 실험은 방향과 거리를 조금 더 늘려, 던전 지도상 가장 깊은 구역에 있는 보물상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새벽별이 미리 배치해 둔 스태프에게 위치를 전달받고 돌아와서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건 진짜 멀어요. 안 되면 안 되는 거예요, 무리 안 하셔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엔 발동까지 시간이 걸렸고, 시야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넘어서 아예 뒤통수 전체가 뻐근했다. 하지만 결국 보물상자의 위치가 떠올랐다. 정확한 위치까지. "저기, 세 번째 통로 지나서 오른쪽 막다른 곳이요." 새벽별이 확인차 스태프에게 무전을 넣었다. 몇 초 후 돌아온 대답에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검증 결과는 명확했다. 투시는 우연이 아니었다. 재현 가능한, 진짜 능력이었다. [시청자] 이거 레전드다 오늘 방송 저장함 [시청자] 저 사람 진짜 누구야 [시청자] 유니크 스킬 아니냐 [시청자] 각성자 커뮤니티에 올려야함 나는 그날 저녁, 새벽별과 근처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방송은 진작 끝난 뒤였고, 내 손끝의 저림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이 정도면 진짜 던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새벽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큰 이벤트도 있어요. 다음 주에 '오픈 챌린지'라고, 여러 팀이 참가하는 공개 던전 방송인데. 거기 참가하면 화제가 될 거예요. 진짜, 이건 대박이에요. 저 이런 스킬 처음 봐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큰 이벤트라면 사람들 눈에 띌 것이고, 그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리다가 손이 멈췄다. 하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하나 있었다. "그 이벤트, 참가자 명단 볼 수 있어요?" 나는 물었다. 새벽별이 스마트폰을 뒤적이더니 화면을 보여줬다. 참가팀 목록 사이,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박태준. 내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훅 치솟았다. 손끝이 떨렸다.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컵라면 국물이 흔들렸다. "저, 이 이벤트 나갈게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새벽별이 내 표정을 보고 뭔가 눈치챈 듯 조심스레 물었다. "저 이름,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짓는, 진짜 웃음이었다. 일주일 뒤, 오픈 챌린지가 열리는 대형 던전 앞. 수백 명의 관중과 수십 대의 카메라가 몰려 있었다. 대형 스크린에는 참가팀 리스트가 순서대로 지나갔고, 곳곳에서 응원 팻말과 함성이 뒤섞였다.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대 앞쪽, 참가팀 대기 구역에서 박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옆머리로 정수리를 가린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낀 채 다른 참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표정, 저 자세.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최악의 스펙을 가진 이 남자가 바로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벽 너머를 꿰뚫어보는 유니크 스킬의 소유자라는 것을. 입장 방송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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