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 너머의 눈

2화

다음 날 오전 9시. 나는 던전배달 협회 서울지부 접수창구 앞에 서 있었다. 낡은 건물 3층, 엘리베이터는 고장 안내문이 붙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손만 대면 부스러질 것 같았으며, 복도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이 마치 지도처럼 얼룩져 있었다. 그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탐험자 등록센터'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는데, 팻말조차 한쪽 모서리가 깨져 있어서 이 협회의 전반적인 재정 상태를 짐작케 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슬리퍼, 늘어난 티셔츠, 며칠 감지 않은 머리. 이 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하품을 참는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등록비 50만 원, 초기 장비 임대료 30만 원, 보증금 20만 원. 합쳐서 100만 원입니다." 나는 통장 잔액의 대부분을 이 자리에서 게워냈다. 이체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는데, 그게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통장이 텅 비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데서 오는 생리적 반응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남은 돈은 24만 7천 원. 이제 물러날 곳도 없었다. "각성 검사부터 하시죠." 직원이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 한쪽에는 오래된 스캐너 같은 기계가 놓여 있었는데, 표면에 자잘한 스크래치가 가득해서 최소 십 년은 굴러다닌 물건 같았다. 나는 거기에 손바닥을 올렸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지더니, 화면에 숫자가 뜨기 시작했다. HP: 20 공격력: 1 방어력: 3 민첩: 5 직원이 화면을 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한쪽만 올라가고,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는 그 일련의 표정 변화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 "음... 이런 스펙은 처음 보는데요." "그게... 낮은 건가요?" "낮은 게 아니라, 역대 최저치입니다." 그는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참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보통 신규 탐험자 평균이 HP 150, 공격력 20 정도인데. 손님은... 슬라임 한 마리도 못 잡으실 것 같은데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백과사전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불운했던 내 인생이, 이 조그마한 숫자 네 개로 다시 한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온갖 불운의 데이터가 하나의 도표로 압축되어 눈앞에 제시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도전은 가능한 거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뭐, 돈만 내시면 못 말리죠." 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더 서글펐다. 내 인생 최악의 스펙을 보고도 그는 이미 몇백 번째 재확인하는 사람처럼 심드렁했으니까. 그날 오후, 나는 초보자용 던전 '작은 균열'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방송용 카메라 하나를 목에 걸고, 빌려온 낡은 목검을 손에 쥔 채, 채널명을 뭘로 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첫 방송을 켰다. 시청자 수는 3명이었다. 3명.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지만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시청자1] 뭐야 저 스펙 실화냐 [시청자2] HP20 공격1 이건 튜토리얼 몬스터한테도 죽는 수준인데 [시청자3] ㅋㅋㅋㅋㅋ 저거 진짜임? 나는 채팅창을 보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눈은 자꾸 화면 하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던전 내부는 습하고 어두웠으며, 발밑의 바닥은 이끼 낀 돌로 이루어져 있어 한 걸음 뗄 때마다 미끄러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벽에서 스며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는데, 그 빛 아래로 첫 몬스터가 등장했다. 슬라임이었다. 가장 약한 몬스터라고 알려진 그 젤리 덩어리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는데, 데미지 표시가 화면에 떴다. 1. 슬라임의 HP는 30이었다. 서른 번을 쳐야 한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빠르게 계산이 된 적이 없었는데, 절박함이 계산 속도를 끌어올리는 모양이었다. [시청자1]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냐 이 노가다 [시청자2] 저거 방송 접어야 되는거 아니냐 [시청자3] 스킬 없냐 스킬 스킬 같은 게 있었다면 이런 협회 접수창구에서 등록비니 임대료니 하는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팔이 뻐근해지고 손바닥에 목검의 나뭇결이 배기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슬라임이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느릿느릿한 움직임을 보고도 나는 긴장했다. 몸통박치기 한 번에 내 HP는 20에서 12로 떨어졌다. 두 번째 박치기에 4. 세 번째에 0. 화면이 붉게 물들며 '사망'이라는 글자가 떴다. "...씨발, 진짜!!" 나도 모르게 육성이 터졌다. 슬라임한테, 그 초보자용 던전의 가장 약한 몬스터한테 죽었다는 사실이 믹서기로 갈리는 느낌이었다. 뼈와 살이 아니라 자존심이 갈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시청자1] 시청자수 3명 중 1명 나감 [시청자2] 개웃기다 진짜 [시청자3] 형 그냥 접어 시청자 한 명이 나갔다는 알림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3명에서 2명으로. 이 숫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줄어들지 상상하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던전 밖으로 다시 튕겨져 나온 뒤, 근처 벤치에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100만 원. 남은 24만 7천 원마저 곧 바닥날 것이다. 던전에 다시 들어가려면 재입장료를 또 내야 한다는 안내문이 앱에 떠 있었고, 그 금액은 5만 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 화면 속 잔액과 재입장료를 번갈아 보다가,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이 답이 나왔다. 다섯 번. 딱 다섯 번 더 죽으면 통장은 텅 비게 된다. "진짜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나는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구름 한 조각 없이 맑은 하늘이 오히려 얄미웠다. 조상신이 정말 나를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 자체가 나에게 저주라도 걸어놓은 것일까? 정말 우연일까? 벤치 옆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목에 카메라를 걸고 혼잣말하는 나를 흘끔거렸다. 그 시선들이 하나같이 '저 사람 뭐 하는 거지'라는 표정을 담고 있었는데,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설명해도 믹서기에 갈린 자존심이 되돌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날 밤, 나는 방송 다시보기를 세 번이나 돌려보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분석해보려 했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스펙 자체가 재앙이었다. 목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자세를 아무리 바꿔도, 애초에 데미지 1이라는 숫자가 바뀌지 않는 한 답이 없었다. 새벽별의 방송에 채팅을 남겼다. '오늘 데뷔했는데 슬라임한테 죽었어요.' 답은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시청자 수천 명이 보는 방송에서 내 채팅 하나가 눈에 띌 리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새로고침을 몇 번이나 눌렀는지 모른다.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이불 속에 파고들면서, 내일은 뭐라도 달라지길 바랐다. 슬라임 하나 못 잡는 인생이라도, 최소한 오늘보다는 나아지길. 나는 아직 몰랐다. 그 실패가 나를 어떤 길로 데려갈지, 그리고 그 길의 시작이 다음 날 겪을 사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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