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혼의 마지막 던전행

5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편함에 또 하나의 종이가 꽂혀 있었다. 부동산 명의였다. 박정호는 그것을 뽑아 들었다. 손끝이 이미 알고 있었다. [임대차 계약 갱신 불가 안내. 계약 만료일 이후 즉시 퇴거를 요청드립니다.] 계약 만료일은 보름 뒤였다. 그는 종이를 든 채 우편함 앞에 잠시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은 건물 다른 우편함들에는 아무 종이도 꽂혀 있지 않았다. 그의 것에만 있었다. 그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열두 개였다. 그는 그 숫자를 세며 내려간 지 오래였다. 오늘도 열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반지하 문을 열었다. 곰팡이 냄새가 먼저 그를 맞았다. 익숙한 냄새였다. 습기와 벽지, 오래된 장판 냄새. 오늘은 그 냄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부엌 쪽에서 나는 냄새였다. 시큼하고 무거운 냄새.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부엌으로 갔다. 어둠 속에서도 냄새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 든 밑반찬들이 색이 변해 있었다. 김치는 이미 곤죽이 되어 있었고, 며칠 전 사둔 두부는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냉장고 온도를 낮춰 놓은 것이 문제였다. 그는 냉장고 온도 조절 장치를 바라보았다. 가장 낮은 칸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을 낮춰둔 날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온 날이었다. 그날도 이런 식으로 뭔가를 아끼려 했고, 그 대가로 뭔가를 잃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 봉투에 담았다. 손이 떨렸다. 분노 때문인지,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봉투가 무거워질수록 손끝의 떨림은 더 커졌다. 찬장을 열었다. 쌀통에는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쌀이 남아 있었다. 라면 몇 봉지가 옆에 쌓여 있었다. 그것이 남은 식량의 전부였다. 그는 쌀통 바닥을 손끝으로 긁어보았다. 쌀알 몇 개가 손끝에 묻어 나왔다. 그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쌀통에 털어 넣었다. 그는 봉투를 든 채 바닥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접히듯 꺾였다. 바닥은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등을 통해 올라왔다. 그는 계약 만료 통지서를 다시 펼쳤다. 보름. 보름 안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종이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몇 번이나 읽었다. 글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읽을수록 글자들이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40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15세, 관청 앞, 아버지의 뒷모습. 박용식은 돈을 받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그날, 박정호는 관청 계단에 앉아 아버지의 등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먼지가 일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박정호는 혼자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혼자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어딘가로 밀려나는 사람이었다. 그때는 관청이었고, 지금은 부동산이었다. 이름만 달라졌을 뿐, 등을 돌리는 방식은 똑같았다. 그는 눈을 떴다.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 끝 쓰레기통에 상한 음식을 버렸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바람은 그의 얇은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쓰레기통 앞에 서 있는 동안, 골목 반대편에서 젊은 모험가 몇이 지나갔다. 그들의 갑옷은 가로등 아래에서 빛났다. 등에는 소형 배송 로봇이 매달려 있었다. 로봇이 그들의 짐을 대신 지고 있었다. 그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던전 몇 층에서 뭔가를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기여도가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그 단어가 박정호의 귀에 박혔다. 기여도. 그의 것은 지금 하락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들 중 한 명이 그를 흘끗 보았다.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노인을 본 것뿐이라는 눈빛이었다. 박정호는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최근 들어 자주 마주치는 눈빛이었다. 무관심. 그것이 지금 이 도시가 그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젊은이들은 곧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로봇의 작은 조명이 마지막으로 깜빡이다 어둠 속으로 묻혔다. 박정호는 다시 반지하로 내려갔다. 문을 닫고 불을 켰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참을 깜빡이다 겨우 켜졌다. 그는 그 깜빡임을 세어보았다. 여섯 번. 예전에는 두세 번이면 켜졌었다. 전등도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았다. 계약 만료 통지서, 던전 출입 제한 통보서, 기여도 하락 경고서. 세 장의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세 장 모두 다른 기관에서 왔지만, 문장의 어조는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정중했고, 단정적이었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는 종이 세 장을 나란히 정렬시켰다. 각도를 맞추었다. 누가 보아도 깔끔하게, 마치 그것이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는 그 손짓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라면 한 봉지를 꺼내 끓였다. 물이 끓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김이 올라오며 곰팡이 냄새를 잠시 가려주었다. 그는 냄비 앞에 서서 그 김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뜨거웠다. 그것이 오늘 하루 중 유일하게 느껴진 온기였다. 그는 손을 냄비 가까이 가져갔다. 뜨거운 김이 손바닥을 스쳤다. 따가웠다. 하지만 그는 손을 물리지 않았다. 이 따가움조차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라면을 먹으며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지하 창으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뿐이었다. 그 발들은 어디론가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구두, 운동화, 하이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발들이었다. 그는 그 발들 중 어느 것도 이 창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이 반지하 창 안에 누가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한지은의 말을 떠올렸다. 신인 보호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그것을 그저 흘려들었다. 하지만 지금, 세 장의 종이를 앞에 두고 다시 떠올리니 그 말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신인 보호. 그 명분 뒤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다른 것이 바로 지금 그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도시가, 이 체제가, 그를 밀어내는 데에는 단순한 나이 이상의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라면을 다 먹은 그는 냄비를 씻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씻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식탁에 팔을 괴고 잠시 앉아 있었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였다. 건전지가 다 되어가는지 초침 소리가 불규칙했다. 똑, 똑ㅡ똑. 그 불규칙한 소리가 오늘 하루의 모든 일들과 닮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옷장을 열었다. 장검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가죽 갑옷도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물건들 특유의 정적인 냄새가 났다. 기름 냄새, 가죽 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세월의 냄새. 그는 갑옷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가죽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때는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쌌던 것이었다. 보름. 보름 뒤면 이 방에서도 쫓겨난다. 던전에도 들어갈 수 없다. 돈도 벌 수 없다. 그는 그 세 가지 사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아보았다. 세 손가락이 접혔다. 남은 손가락은 없었다. 그는 장검을 손에 쥐었다. 손잡이의 닳은 가죽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감촉은 여전히 익숙했다. 수십 년 동안 이 손잡이를 쥐어온 손이었다. 어디선가 낮은 진동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웅— 그것은 이 방에서 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손끝은, 여전히 그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 나던 소리였다. 균열이 열리기 직전의 그 낮은 울림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다시 눈을 떴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형광등만이 낮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는 장검을 다시 걸지 않았다. 식탁 위, 세 장의 종이 옆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칼과 종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물건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자연스러웠다. 둘 다 그의 삶을 결정짓는 것들이었다. 창밖에서 발소리가 계속 지나갔다. 박정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형광등을 끄지 않았지만, 방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 어두워진 것은 방이 아니라 그의 눈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몇 번 반복했다. 세 장의 종이와 장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사라질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부동산 관리인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는 짧고 규칙적이었다. 세 번, 간격을 두고 다시 세 번. 박정호는 그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밤새 식탁에 앉아 있었던 탓에 목과 어깨가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손에는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문 너머, 관리인의 그림자가 문틈으로 어른거렸다. "박정호 씨. 조기 퇴거에 대해 안내드릴 일이 있어서요." 목소리는 사무적이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업무를 처리하는 목소리였다. 박정호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 말을 듣고도 문을 열지 않았다. 손끝에 문고리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는 그 차가움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이곳에, 이 삶에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문 너머로 관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금 더 단호해진 목소리였다. 서류철을 넘기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 "오늘 안으로 답을 주셔야 합니다." 박정호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 반대편에서, 관리인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문틈으로 보이는 그림자는 조금씩 발을 옮기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의 몸짓이었다. 박정호는 여전히 문을 열지 않았다. 그의 등 뒤, 식탁 위에는 세 장의 종이와 장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문밖의 목소리는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