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혼의 마지막 던전행

4화

박정호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박정호 씨." 목소리가 익숙했다. 고개를 돌렸다. 한지은이었다. 길드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가 사무직 같은 옷차림이었다. 어깨에 각진 서류 가방을 메고 있었다. 목에는 신분증 카드가 걸려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5년, 아니 6년쯤 만인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구려." 한지은은 웃으며 다가왔다. 그 웃음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박정호가 기억하는 그 웃음이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둘을 스쳐 지났다. 누군가는 배송용 드론을 밀며 지나갔다. 누군가는 휴대용 단말기를 보며 걸었다. 도시의 오후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신형 배송·기록 장비 배포 담당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 일 때문에 이 근처에 나온 참이었다. 가방 안에는 배포용 서류와 태블릿이 들어 있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늘 이런 얼굴이오." "그렇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박정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지은은 그 침묵을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근처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 앉을까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벤치는 차가웠다. 하지만 오랜만에 앉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벤치 옆에는 오래된 가로수가 서 있었다. 잎이 몇 개 떨어져 발밑에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조금씩 움직였다. "20년 전, 제가 신인이었을 때요." "기억하오." "3층 던전에서 제가 다리를 다쳤을 때, 박정호 씨가 저를 업고 나왔죠." "그건 그냥,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많았어요. 그런데 업고 나온 건 박정호 씨뿐이었어요." 박정호는 그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40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얼굴과 사건이 뒤섞여 있었다. 누구를 구했는지, 누구를 놓쳤는지, 이제는 순서조차 흐릿했다. 하지만 한지은의 다리에서 흐르던 피의 색, 그것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붉었다. 너무 붉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어깨에 그 피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그 온도가 손끝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저는 늘 박정호 씨를 챙기려고 했어요." "알고 있소." "근데 이번엔 제가 챙길 수 있는 게 별로 없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박정호는 그녀를 보았다. 예전보다 얼굴이 상해 있었다. 눈 밑에 그림자가 있었다. 피부는 조금 거칠어졌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늘어 있었다. 20년 전 신인이었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겹쳐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쪽도 사정이 있소?" "신형 배송 기계요. 제가 배포 담당인데... 그게 배포될수록 저 같은 사람은 필요 없어지거든요." 한지은은 손에 든 태블릿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을 켜자 밝은 빛이 얼굴에 비쳤다. 화면에는 작은 로봇 사진이 떠 있었다. 둥근 몸체, 바퀴 대신 다리 형태의 관절이 달린 기계였다. 다리는 네 개였고, 각 관절마다 은색 마디가 붙어 있었다. 겉면은 매끈한 흰색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었다. 어딘가 작은 짐승을 흉내 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게 배송뿐 아니라 던전 내부 기록까지 다 해요. 그러니까..." "당신 자리도 사라진다는 거요." "네." 그녀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한숨에 가까운 소리였다. "저 로봇, 이름이 뭔 줄 아세요." "모르오." "'도우미'래요. 이름은 참 착한데." 박정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지은은 화면을 몇 번 더 넘겼다. 로봇이 던전 내부를 이동하는 시연 영상이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서도 흔들림 없이 균형을 잡았다. 벽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영상 속에서 로봇은 작은 카메라 눈으로 주변을 훑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이게 있으면 사람이 굳이 안 들어가도 돼요. 기록도, 배송도, 다 이게 하니까." "그럼 당신은." "저는... 아직은 필요해요. 근데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어요." 그녀는 태블릿을 다시 가방에 살짝 밀어 넣었다. 완전히 넣지는 않았다. 마치 다시 꺼낼 준비를 해두는 것처럼. "저도 언제까지 이 길드에 남아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박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처지가 자신과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다.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사람은 기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규정에 밀려나고 있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종착지는 비슷해 보였다. "신인 보호 규정 때문에 던전에 못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알고 있었소?" "어제 게이트 앞에서 있었던 일, 보고서에 올라왔어요. 그거 제가 봤어요." 박정호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일이 이미 문서가 되어 돌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자신의 일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종이나 화면 위에 문자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이상하게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보고서에... 뭐라고 쓰여 있었소." "별건 아니에요. 그냥 시간, 장소, 상황 정도. 그리고 처리 결과요." "처리 결과라니." "입장 불가, 라고요." 박정호는 입을 다물었다. 두 글자였다. 그 두 글자가 어제 그가 겪은 모든 일을 요약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냥... 걱정돼서." "미안할 것 없소." "박정호 씨,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 질문에 박정호는 잠시 말을 고르지 못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답할 말이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창밖을 보고, 다시 눈을 감는 일. 그것을 어떻게 지낸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냥 지내고 있소." "식사는요." "챙겨 먹고 있소."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다. 한지은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그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소매 끝이 조금 낡아 있었다. 신발도 오래 신은 흔적이 보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그게 미안해요." "당신이 미안할 일은 아니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거리의 소음이 그 침묵을 채웠다. 오토바이 소리, 사람들의 발소리, 어딘가에서 들리는 로봇의 안내음. 멀리서 배송 로봇 한 대가 인도를 지나갔다. 바퀴 소리가 아니라 규칙적인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탁, 탁, 탁. 관절이 지면에 닿는 소리였다. 박정호는 그 소리를 무심코 눈으로 좇았다. 한지은도 그것을 보았다. "저것도 신형이에요." "..." "저게 배포되기 전에는, 사람이 직접 손수레를 끌고 다녔어요. 이제는 저게 다 해요." 박정호는 그 로봇이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탁, 탁, 탁.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지은이 태블릿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가방 지퍼를 닫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오늘 배포 마감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가시오." "박정호 씨." "뭐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삼키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했다. "이 규정, 그냥 신인 보호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요." 박정호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오." 한지은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주변을 잠깐 살피는 눈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다음에...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요." 박정호는 더 묻고 싶었다. "언제." 라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조심히 지내세요." 그 말을 남기고 한지은은 걸어갔다. 걸음이 빨랐다. 가방끈을 손으로 다시 고쳐 매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박정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유니폼 색이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흐려졌다. 결국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신인 보호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무엇이 목적이라는 것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그 목적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 질문은 늘어났지만 답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손끝은 아직 차가웠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와 낙엽을 몇 개 더 떨어뜨렸다. 그중 하나가 그의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끝으로 집어 옆으로 치웠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다시 로봇의 발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였다. 누군가 다른 곳으로 짐을 옮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정호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걸음이 무거웠다. 등 뒤로 도시의 소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그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한지은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랐다. 신인 보호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적인가.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채 계속 걸었다. 길 위로 저녁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 끝에, 그가 아직 보지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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