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퇴사하고, 던전 갑니다

4화

부사장실 문을 열었을 때, 차경훈은 이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양식이었다. 내가 서명했던 권고사직 서류였다. 종이 모서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저 서류 한 장이 지난 몇 주간 나를 이렇게 애태우게 만든 물건이라는 게 새삼 우스웠다. "앉으세요." 앉으라는데 앉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필요 이상으로 푹신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것이 그랬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사람을 눌러 앉히려는 듯이. "국가던전관리청에 민원 넣으셨더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봐야 답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정보가 새는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구멍 중 하나가 방금 전까지 나와 웃으며 인사를 나눈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때는 아직 하지 못했다. "제 퇴직 서류가 이 주째 결재가 안 나서요. 정당한 조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당한 조치." 차경훈이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저 눈은 늘 저랬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동자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강태윤 씨, 제가 왜 결재를 미뤘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신사업 초기 자료들, 던전 채굴 승인 관련 세부 데이터, 그거 전부 강태윤 씨 손에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그 데이터에 문제가 좀 있어요." "문제라뇨." "채굴 효율 조작 정황이 좀 보이던데."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조작이라니, 이 사람이 지금 뭘 준비하고 있는 건지 대충 감이 왔다. 삼 년 동안 이 회사에서 만들어낸 데이터가 몇 백 건인데, 그중에 딱 하나 골라서 조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숫자는 어떻게든 애매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으니까. 내가 순순히 나가면 그냥 놔줄 생각이었는데, 국가 기관에 민원을 넣었으니 이제는 반격 카드를 꺼내는 거였다. 순서가 딱 맞았다. 내가 조용히 있었으면 이 카드는 서랍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었을 거다. "조작한 적 없습니다. 검사 매뉴얼대로 진행했고, 던전 관리청 승인 절차도 다 밟았습니다." "그건 조사해봐야 아는 거고요." "그러니까요. 결국 저를 붙잡아두시겠다는 거네요." 차경훈은 손가락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손톱이 유난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손톱 정리할 시간은 있는데 결재 도장 찍을 시간은 없는 모양이었다. "붙잡는 게 아니라, 조사가 끝날 때까지 퇴직을 보류하는 거죠. 이건 회사 입장에서도 정당한 절차예요." 말이 많아진다. 이 사람은 지금 필요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정말로 정당한 조치라면 이렇게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뭔가 다른 계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순순히 조사에 협조하면, 조사 결과랑 관계없이 퇴직시켜주실 겁니까?" "그건 조사 결과 봐야죠." "그럼 저는 여기서 영원히 못 나가는 거네요." 차경훈이 처음으로 웃음을 지워냈다. 그 순간의 얼굴이 오히려 더 정직해 보였다. 웃지 않을 때가 진짜였다. "강태윤 씨,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근데 국가 기관에 먼저 민원 넣은 건 강태윤 씨잖아요. 조용히 있었으면 저도 조용히 처리해드렸을 텐데." 이건 협박이었다. 협박을 존댓말로 하는 게 이 사람의 특징이었다. 목소리 톤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사람 인생을 저울질하는 재주가 있었다. 부사장실을 나오면서 손끝이 차가웠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은 따뜻했는데 손끝만 시렸다. 이대로면 정말 몇 달, 몇 년이든 이 회사에 발이 묶일 수 있었다. 조작 정황이라는 카드는 언제든 다시 꺼낼 수 있는 만능 카드였다. 오늘 접었다가 내일 다시 펼쳐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카드. 사흘 뒤, 국가던전관리청에서 정식 공문이 발송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담당 조사관이 직접 회사를 방문한다는 소식도 함께 왔다. 사흘 만에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라서, 오히려 불안했다. 너무 빠른 건 좋은 신호가 아닐 때가 많았다. 조사관은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명함에는 '국가던전관리청 인력관리과 정도현 주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명함을 받아 든 손끝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태윤 씨, 상황 대략 파악했습니다." 정도현은 회의실에 앉아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일을 하도 많이 봐서 지친 얼굴이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짓도 어딘가 익숙했다. 몇백 번은 반복했을 동작 같았다. "채굴 효율 조작 얘기, 그거 사실 관계없는 얘기더라고요." "어떻게 아세요?" "던전 관리청 승인 기록 다 저희 쪽에 있어요. 강태윤 씨가 제출한 데이터, 승인 절차 전부 정상이었습니다. 조작 정황이라는 건 부사장 쪽에서 급하게 만들어낸 명분이에요." 뭔가 시원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답답했다. 그 정도 명분이 이렇게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거였으면, 지금까지 왜 이런 일을 벌인 건가 싶었다. 애초에 통하지도 않을 카드를 그렇게 여유롭게 흔들어 보인 이유가 뭘까. "그럼 이제 퇴직 처리 되는 겁니까?" "그게 좀 복잡한데." "뭐가 복잡해요." "회사 쪽에서 강태윤 씨 퇴직을 막을 법적 근거는 없어요. 근데 인사 절차라는 게, 법적 근거가 없어도 실무적으로 계속 지연시킬 수는 있거든요. 서류 하나 빠졌다, 결재란이 하나 더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그럼 어떻게 해결하나요." 정도현이 서류를 덮고 나를 똑바로 봤다.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사무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가 보였다. "저희 쪽에서 강제 이행 명령을 내릴 수는 있어요. 근데 그거 하려면 강태윤 씨가 좀 확실한 입장을 밝혀주셔야 해요." "어떤 입장이요." "이 퇴직이 부당한 인력 억류라는 걸 공식적으로 진술하시고, 필요하면 조사 자료도 저희한테 다 넘겨주셔야 합니다. 회사랑 관계가 완전히 끝장난다는 뜻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끝장난 관계였다.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부사장실에서 협박을 존댓말로 듣고 나온 순간부터 이미 이 관계는 끝난 거였다. "네, 괜찮습니다." 정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챙겼다. 서류 뭉치를 서류철에 밀어 넣는 손짓이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무적인 손짓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럼 이번 주 안에 강제 이행 명령서 발송할게요. 그거 받으면 회사도 더 이상 끌 명분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결론이 나는 듯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 회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삼 년 동안 이 회사에 묶여 있던 시간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그런데 회의실 문을 열자 복도에 서연이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선배, 조사관이랑 얘기 끝났어요?" "끝났어. 곧 퇴직 처리될 것 같아." 서연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사장님이 강태윤 씨 퇴직 서류에 직접 개입한 거, 저도 알고 있었어요." 숨이 멈췄다. "뭐?" "조작 정황 얘기, 그거 부사장님이 저한테 만들라고 시킨 거예요. 데이터 몇 개 골라서, 애매하게 보이도록." 서연이 그렇게까지 이 일에 관여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배신감보다 먼저 든 감정은 이상하게도 걱정이었다. 그녀가 이런 일까지 시켜지면서 무슨 처지에 놓여 있는지,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 손도 자기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걸 했어." "거부하면 저도 잘려요, 선배. 아니, 잘리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더 안 좋은 일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그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묻고 싶었다. 이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 안 좋은 일'이 뭐가 있을지,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데, 서연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시선을 복도 끝으로 돌렸다. 나도 따라 봤다. 차경훈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빨랐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하는 거, 저도 위험해요. 근데 이건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서연이 빠르게 속삭이더니, 차경훈이 가까워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굽 낮은 신발이 복도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차경훈이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 웃음이 아까 부사장실에서 본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저 사람도 지금 뭔가 계산이 어긋난 게 분명했다. "강태윤 씨, 국가 기관 조사관까지 만나셨다면서요."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여유가 아니라 다른 게 섞여 있었다. 다급함,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 삼 년 동안 이 사람의 여유로운 목소리만 들어왔던 나로서는, 그 미세한 균열이 오히려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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