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공고문은 짧았다.
『신사업 조직 재편의 건: 기존 신사업팀을 해체하고 마석전략기획실 산하로 통합. 팀장 이하 실무 인력 중 일부는 재배치, 일부는 인사평가 대상.』
인사평가 대상이라는 표현이 재밌었다. 실제로는 퇴출 대상이라는 뜻인데, 회사는 늘 이런 식으로 단어를 골라 쓴다. 자르는 게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다. 참으로 세련된 폭력이었다.
사내 인트라넷에 뜬 게시물 아래에는 조회수가 벌써 삼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댓글은 없었다. 이런 공고에 댓글을 다는 사람은 없다. 다는 순간 자기 이름도 다음 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는 걸 이 회사 사람들은 다 알았다.
내 이름은 인사평가 대상 명단에 있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취소해야 했다.
적어도 명단에 올라갔다는 건 아직 회사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삼 초도 못 갔다. 인사평가라는 게 결국 퇴사 압박용 서류 작업이라는 걸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온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명단을 다시 훑어봤다. 신사업팀 팀장이었던 나, 그리고 나와 같이 던전 채굴 승인 서류를 만들었던 대리 두 명. 재배치 대상에는 낯선 이름들이 더 많았다. 살아남은 사람과 잘려나갈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뭔지 궁금했지만, 궁금해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강태윤 씨."
인사팀 김 과장이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표정이 이미 결론을 다 정해놓은 사람 같았다. 책상 위에는 파일이 세 개나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내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신사업 초기 관리자로서 사업 부진에 대한 책임 소재를 좀 정리해야 해서요."
"책임 소재요? 사업 방향 자체를 부사장님이 바꾸시겠다는 거 아니었나요."
"그거야 미래 얘기고, 과거 성과에 대한 평가는 따로 진행되는 거니까요."
말이 안 됐다. 그게 말이 되나요,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회사에서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마석 순도 검사 매뉴얼에서 채굴 효율 저하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시는데."
"그건 던전 관리청 채굴 승인 조건이 갑자기 강화돼서 생긴 문제였고, 제가 이미 보고서로 세 번 올렸습니다."
"세 번이나 올렸다고요?"
"네. 이메일 로그 확인하시면 나올 거예요. 날짜까지 다 남아 있습니다."
김 과장은 서류를 뒤적이며 대답을 피했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회의실 안을 채웠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줬다. 이미 결론이 나 있고, 나는 형식적인 절차를 밟고 있을 뿐이었다.
"그 로그, 확인은 하실 거죠?"
"네, 뭐, 검토는 하겠습니다."
검토는 하겠다는 말은 회사어로 안 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을 세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데, 세 번 다 실제로 아무것도 검토되지 않았다.
회의실을 나오며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기 정 대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태윤아, 너 요즘 진짜 조심해야 돼."
"왜."
"위에서 이번 사업 실패 원인, 신사업팀 초기 관리자한테 다 몰아준다는 얘기 있어. 배신자 프레임 씌우는 거 같은데."
"배신자? 내가 뭘 배신했는데."
"몰라, 그건 나도 모르는데, 위에서 그런 단어 쓴다는 게 심상치 않다는 거지."
배신자. 재밌는 표현이었다. 삼 년 동안 야근하며 지켜온 사업에서 배신자로 몰리는 건 좀 억울했지만, 회사에서 억울함이란 감정은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었다.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기획실 쪽 애가 흘린 거야. 자세히는 말 안 하려고 하더라. 근데 표정 보니까 진짜인 거 같더라고."
정 대리는 그 말을 하고 자기 자리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소문이 이렇게 빨리 도는 회사에서, 정작 내가 제일 늦게 알고 있었다는 게 우습다고.
그날 오후, 마석전략기획실 창립 기념 겸 조직 개편 발표회가 대강당에서 열렸다. 나는 명단에 있으니 참석 의무가 있었다. 강당 입구에서 나눠주는 자료집을 받아들었는데, 표지에 큰 글씨로 '새로운 도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새로운 도약이라니. 내 도약은 벌써 끝나 있는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 무대를 보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이상한 순서를 진행했다. 조직 개편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으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의 표정이 뭔가 들뜬 기색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특별한 발표가 있다고 합니다. 차경훈 부사장님, 나와 주시죠."
차경훈이 무대로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서연이 함께 올라갔다. 옷차림이 평소보다 격식 있었다. 회색 슈트 대신 짙은 남색 원피스에, 늘 뒤로 묶던 머리도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알아챈 게 이 강당 안에서 몇 명이나 될까 생각했다.
"오늘 사업 방향 발표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하고 싶습니다."
차경훈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강당 전체에 울렸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뭔가를 확정적으로 발표할 때 나오는, 이미 결과가 다 정해진 사람의 여유였다.
"백서연 비서와 혼약을 맺게 됐습니다."
강당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가 곧 박수가 터졌다. 옆줄에서 누군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고, 앞줄에서는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나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이 차갑게 굳는 느낌이 목 뒤까지 올라왔다.
서연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색했다. 그녀를 오래 봐온 사람만 알 수 있는 종류의 어색함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무대 아래 어딘가를 스치듯 훑고 있었다. 나를 찾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수 소리 사이로 옆자리 정 대리가 나를 흘끔 봤다.
"괜찮냐?"
"뭐가."
"너 백서연 씨랑 예전에 뭐 있었다는 소문..."
"소문일 뿐이잖아."
"소문이 진짜여도, 뭐, 나야 상관없지만."
정 대리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캐물었다면 어떻게 답했을지 나도 몰랐다.
괜찮았다.
괜찮지 않았다.
둘 다 사실이었다. 사람 감정이 그렇게 딱 하나로만 정리되는 게 아니었다. 서연과 나 사이엔 결론 난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결론이 이런 식으로 대신 나버렸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통해, 강당을 채운 수백 명의 박수 소리 속에서.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무대 앞으로 몰려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이,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강당 밖 복도에서 담배 생각이 간절했는데 끊은 지 삼 년째라 참았다. 대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셨는데,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태윤 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차경훈이었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넥타이도 안 풀고 여기까지 따라 나온 걸 보면, 나를 찾으러 나온 게 분명했다.
"어떻게,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들었죠."
"예전에 서연 씨랑 좀 가까웠다면서요."
숨이 턱 막혔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놀리고 있는 건가, 아니면 뭔가 확인하려는 건가. 캔커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거 얘기죠."
"과거 얘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요즘 회사 분위기가 좀 뒤숭숭하잖아요. 인사평가 명단에도 올라가 계시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데, 지금 그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강태윤 씨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시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요.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서 어떻게 엮일지 모르니까요."
차경훈은 그 말을 하며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뒷맛이 씁쓸했다. 그 짧은 대화 안에 뭔가 경고와 협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이해했다. 그때는 그냥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다.
복도 창문 너머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강당 안에서는 여전히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만 그 소리 밖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저녁 무렵, 자리를 정리하다가 서연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화면에 뜬 알림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열었다.
[선배, 그날 옥상에서 한 말 기억하죠.]
[조심하라는 거요?]
[네. 지금부터가 진짜예요.]
메시지는 거기서 끊겼다. 다시 답을 보내려 했지만 이미 읽음 표시만 뜨고 서연은 온라인 상태를 끊었다. 몇 번 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라니.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혼약 발표까지 나온 오늘 하루가 진짜의 시작이 아니라 그 앞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뒤에 뭐가 더 있다는 건가. 서연이 저런 문장을 아무 의미 없이 보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다가, 인사평가 명단 파일을 다시 열어봤다. 아까는 급하게 훑고 지나가서 못 봤던 부분이 있었다.
인사평가 명단에 오른 내 이름 위로, 결재 대기 도장이 하나 더 찍혀 있었다. 결재란에 적힌 서명은 다름 아닌 차경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