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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퇴사를 결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사평가 결과가 나오는 날, 회의실에 앉아 서류를 받았다. 종이 한 장짜리 평가서였는데 무게는 삼 년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사업 부진에 대한 책임, 관리 소홀, 협업 능력 부족. 세 줄로 삼 년을 정리한 셈이었다. 삼 년 동안 야근하며 갈아 넣은 시간을 세 줄로 압축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효율적이라고 해야 할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강태윤 씨, 재배치 대상에서 제외되셨어요." 김 과장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목소리였다. 제외됐다는 표현이 웃겼다. 잘렸다는 뜻이었다. 회사는 사람을 자를 때도 꼭 완곡어법을 쓴다. 재배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직 효율화 과정에서 역할이 재조정되었다, 뭐 그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당신은 이제 여기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면 소송 걸릴까 봐 무서운 걸까, 아니면 스스로 죄책감을 덜고 싶은 걸까.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나요." "권고사직 서류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절차는 빠르게 진행될 거예요." 빠르게 진행될 거라는 말이 그렇게 우스운 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서명은 그날 바로 했다. 손이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온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삼 년 동안 끌려다니던 걸 스스로 끝낸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건 사업 자료 인수인계와 퇴직금 정산, 그 정도의 잔업뿐이라고 생각했다. 퇴직금 받으면 뭐부터 할까, 그런 김칫국 마시는 계획까지 세웠다. 밀린 잠부터 자고, 그다음엔 다니지 않던 헬스장 등록이나 해볼까, 뭐 그런 소박한 것들.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는 이 주가 지나서야 알았다. "강태윤 씨, 퇴직 처리가 좀 밀렸어요." 인사팀에서 온 전화였다. 목소리가 미안한 듯도 아닌 듯도 했다. "밀렸다뇨. 서명한 지 벌써 이 주 됐는데요." "부사장님 결재가 아직 안 났어요." "부사장님 결재가 왜 필요해요, 권고사직인데." "신사업 관련 인력은 부사장님 직결 승인이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그런 규정이 원래 있었어요?" "저희도 이번에 새로 안내받았어요." 새로 안내받았다는 말이 핵심이었다. 규정이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 필요할 때 만들어냈다는 뜻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니터 화면보호기가 몇 번이나 켜지고 꺼지는 걸 그냥 지켜봤다. 이건 단순 지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서류를 붙잡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이미 명확했다. 차경훈. 이 회사 부사장. 신사업팀을 통째로 날려버린 사람이자, 서연의 지금 상사이자,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려는 이유 중 절반쯤을 차지하는 사람. 다음 날 나는 차경훈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럴 땐 예전 같으면 서연에게 먼저 문자라도 보냈을 텐데, 요즘은 그럴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비서 자리에는 서연이 앉아 있었다. "부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서연은 내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뭔가를 읽으려 했다. 반가움인지, 곤란함인지, 아니면 그냥 무심함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약속 잡으셨어요?" "아니. 그냥 잠깐, 퇴직 서류 때문에." "부사장님 지금 회의 중이세요. 약속 잡고 오세요." 존댓말이 유독 딱딱했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상황에선 안에 들어가게 해주거나, 최소한 좀 기다리라는 말 정도는 했을 텐데. 지금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이라는 걸 서로에게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서연아." "백서연 비서입니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이름 대신 직함으로 불러달라는 건, 우리 사이의 모든 사적인 맥락을 지우겠다는 선언이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건지, 아니면 스스로 그러기로 정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겠어요, 백서연 비서님. 그럼 약속 잡아드릴 수 있나요." "일정 확인해서 연락드릴게요." 그 대답만 하고 그녀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타자 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건 대화가 아니라 절차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 방문객 접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돌아보니 서연이 문서 하나를 손에 쥔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딱딱함이 순간적으로 벗겨진 얼굴이었다. "이 서류들, 다 부사장님 손에 걸려 있어요. 그냥 조용히 기다리세요." "조용히 기다리면 언젠간 나가진다는 거야?"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문서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짧은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오며 복도에서 정 대리를 다시 만났다. 정 대리는 원래도 소식이 빠른 사람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빨라진 느낌이었다. "태윤아, 소문 들었어?" "또 무슨 소문." "부사장님이 너 퇴직 서류, 일부러 안 결재해준다는 얘기 있어. 이유가 뭔지 알아?" "몰라. 알려줘." "너 서연 씨랑 예전 일 때문에, 확실하게 못 박아두려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어. 완전히 정리 안 된 상태에서 그냥 회사 나가면, 나중에 뒷말 나올까 봐." 뒷말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냥 지쳐서 나가려는 회사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선 그 단순한 사실 하나조차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회사라는 곳은 사람의 사생활도 결국 회사 자산 목록에 슬쩍 끼워 넣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 대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여기 부사장, 원래 그런 사람이야. 자기 거라고 생각한 건 손에서 완전히 놓기 전까지 절대 안 놔." "그럼 나도 걔 소유물이라는 거야?" "넓게 보면. 신사업팀도 그렇게 접었잖아. 필요 없어졌다고 바로 없앴으면서, 정리하는 속도는 지 마음대로였잖아." 서류가 필요한 만큼, 사람도 필요하면 붙잡아두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서연도 그런 식으로 붙잡힌 걸까.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 속이 답답해졌다. 정 대리는 내 표정을 보고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어깨만 한 번 두드리고 지나갔다. 일주일이 더 지나도 결재는 나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회사에 출근은 계속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신사업팀은 이미 해체됐고, 나는 어느 팀에도 속하지 않은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무 의미 없는 서류를 뒤적이는 게 하루 일이었다. 가끔 누군가 지나가다 "아직 계셨어요?" 하고 묻는 게 유일한 대인 접촉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뼈아픈 질문인지 그 사람들은 몰랐다. 점심시간에도 어울릴 팀이 없어서 혼자 회사 근처 식당을 돌았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댓국. 메뉴만 바뀌고 혼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 회사에서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게 더 서러운 일이라는 걸 그때 배웠다. 그러다 우연히 사내 게시판에서 공고 하나를 봤다. 『국가던전관리청, 기업 인력 이동 관련 민원 상담 창구 운영 안내』 민원. 나는 그 단어를 오래 들여다봤다. 이 상황이 회사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된다면, 외부로 끌고 나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국가던전관리청이 기업의 부당한 인력 지연에 개입할 권한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마석 산업이 국가 통제 아래 있는 만큼, 인력 관련 규정도 국가가 최종 관리한다는 논리였다. 던전이 열리고 마석 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으로 지정된 이후로, 이 업계에 관련된 건 뭐든 국가가 끝까지 들여다볼 권한을 가진다고 했다. 평소엔 그게 귀찮은 규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유일한 구원줄처럼 보였다. 다음 날 나는 정식으로 국가던전관리청에 민원을 접수했다. 신청서를 넣으면서도 이게 진짜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국가 기관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하는 일은 늘 예상보다 느리기 마련이었다. 신청서 칸을 채우면서 이런 걸 넣는다고 부사장이 눈이나 깜빡할까 싶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흘 뒤 전화가 왔다. "강태윤 씨 맞으시죠? 국가던전관리청 인력관리과입니다." "네, 맞습니다." "민원 확인했고요, 담당 조사관이 배정됐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회사 쪽에 공문 발송될 예정이에요." "공문이 발송되면 뭐가 달라지나요."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퇴직 절차를 지연시키는 건 명백한 위반 사항이라서요. 공문 받으면 대부분 바로 처리됩니다." "대부분이라는 건 아닌 경우도 있다는 뜻인가요." "드물게 이의제기하는 기업도 있긴 한데, 이번 건은 사유가 명확해서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정부 기관이 이렇게 빨리, 이렇게 확실하게 움직여준다는 게 오히려 낯설었다. 세상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리가 없다는 불안이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이 소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조용히 처리되길 바랐다. 회사에 시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서연이 이 일에 얽히는 걸 원치 않았다. 서연은 지금도 충분히 힘든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나 때문에 더 곤란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들 나를 힐끗거리며 수군댔다. 몇몇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고, 몇몇은 대놓고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들이 뭘 뜻하는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태윤 씨, 잠깐 부사장실로 오시라는데요." 인사팀 직원의 전달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는 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국가던전관리청 공문이 발송되기도 전에, 이미 뭔가가 새어나간 게 분명했다. 사흘 전 통화한 담당자가 나에게만 알려줬을 리는 없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미 나보다 먼저 그 소식을 듣고 손을 쓴 거였다. 부사장실로 향하는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밑에서 카펫이 삐걱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기 전,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뭔지, 짐작조차 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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