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약체 마물사의 역주행

4화

등급 심사일이 잡힌 건 자갈 능선 사건 이후 사흘 뒤였다. 그 사흘 동안 나는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A등급이든 B등급이든, 심사에서 좋은 결과를 받으려면 결국 '보여줄 게' 있어야 했고, 나한테 그 보여줄 게라는 건 다름 아닌 마물 재고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사흘을 통째로 마물 사냥에 갈아넣었다. 첫날은 자갈 능선에서 한 단계 위인 던전을 찾아 헤맸다. 협회 게시판에 올라온 정보를 뒤져가며 오크가 자주 출몰한다는 구역을 특정했고, 거기서 오크 두 마리를 산 채로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이 순탄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오크 한 마리가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이 났고, 나는 그 도끼날을 피해가며 [포획] 스킬을 세 번이나 시전해야 했다. 세 번째에 겨우 성공했을 때는 손이 떨려서 한동안 단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다. 둘째 날은 흡혈박쥐 무리를 노렸다. 이놈들은 개체 하나하나는 약했지만 무리로 움직이는 습성 때문에 포획이 까다로웠는데, 결국 좁은 동굴 입구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다섯 마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시험 삼아 오크 한 마리를 근처 폐허에 던져봤다. [오크를 대상으로 투척 공격을 시전합니다.] [치명타 판정. 경험치 1,240을 획득했습니다.] 1,240. 슬라임 시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숫자였다. 그 시절 나는 슬라임 한 마리를 잡을 때마다 3에서 5 사이의 경험치를 받는 게 고작이었으니, 단순 비교로만 따져도 거의 300배에 달하는 성장이었다. '...이게, 이렇게 되는 거였나' 하는 얼떨떨한 감상이 들었지만, 곧이어 더 실용적인 계산이 따라붙었다. 이 정도 경험치 곡선이라면, 등급 심사에서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는 확신이었다. 심사장은 협회 건물 지하에 마련된 별도의 시험 공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실제 던전 환경을 시뮬레이션해 응시자의 등급을 산정한다고 했다.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냉방이 지나치게 세다는 거였고, 두 번째로 느낀 건 다른 응시자들의 시선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다른 응시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아마 내가 걸친 허름한 장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이 최소 검사나 궁수 계열로 보이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후줄근한 가죽 조끼에 녹슨 단검을 든 나 같은 사람은 여기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누군가는 반짝이는 롱소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교하게 세공된 활을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그냥 조용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직업이 뭐예요?" 하고 옆자리 응시자가 물었을 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대로 답했다. "마물사요." "...아" 하는 짧은 반응이 돌아왔는데, 그 짧은 반응 안에 담긴 동정심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동정심은 나를 향한 것이었고, 안도감은 자신이 나보다 나은 처지라는 확인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고는 더 말을 걸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편했다. 나는 그 시선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로 보여주면 될 일이었으니까. 이름이 불릴 때까지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그려봤다. 출입구 근처에 뭐가 있을지, 몬스터 배치는 어떤 식일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십오 분이라는 시간은, 마물을 던지는 방식으로 싸우는 나한테는 오히려 넘칠 만큼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 내 차례가 되어 시험장으로 들어섰을 때, 감독관이 규칙을 설명했다. "제한 시간 십오 분 동안 시뮬레이션 던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성과를 내시면 됩니다. 등급은 처치 수, 생존 여부, 효율성을 종합해 산정됩니다." "마물 포획도 성과로 인정되나요?" 하고 내가 묻자, 감독관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획 후 실제 전투 기여도가 있어야 인정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전투 기여도라...' 던지는 것도 기여도로 쳐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가 증명해줄 문제였다. 감독관의 표정은 이 절차를 수백 번은 반복해온 사람의 얼굴이었고, 나 같은 마물사 응시자는 아마 그에게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무심함이 곧 뒤집힐 거라는 걸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시뮬레이션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미리 준비해둔 오크 두 마리를 꺼내 출입구 근처에 배치된 고블린 무리를 향해 연달아 던졌다. 콰콱!! 부우웅...!! 둔중한 충돌음이 시험장을 채웠고, 무리의 절반이 그 자리에서 쓸려나갔다. 오크의 거체가 고블린 무리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생긴 파동이 시험장 바닥을 흔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은 고블린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나는 흡혈박쥐 세 마리를 추가로 던져 나머지를 정리했다. 박쥐들은 던져진 즉시 날아오르며 남은 고블린들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상 무기가 스스로 목표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십오 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시험장에 배치된 몬스터의 8할이 사라졌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더 이상 처치할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생각과 '혹시 뭔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동시에 들었는데, 결국 시간은 흘러가고 시뮬레이션이 종료를 알렸다. [시뮬레이션 종료. 결과를 산정합니다...] 감독관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무심했던 그 얼굴이, 결과창을 확인하는 순간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화면을 봤다. 그 반복이 세 번쯤 이어지자 나도 슬쩍 불안해졌다. '설마 뭐 잘못됐나' 싶었지만, 곧이어 든 생각은 오히려 반대였다. 잘못된 게 아니라 너무 잘 나와서 저러는 거 아닐까. "이건... 잠시만요" 하고 그가 몇 번이나 화면을 다시 확인하더니, 결국 옆에 있던 다른 감독관을 불렀다. 둘이서 뭔가를 나지막이 상의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번갈아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뭔가를 확인했고, 한 명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전화를 걸러 나가기까지 했다. [등급 심사 결과가 확정되었습니다.] [판정 등급: A] [비고: 강남지부 개설 이래 마물사 직업군 최고 등급 기록입니다.] 나는 그 문구를 읽고 잠시 멍해졌다. A등급이라니. F등급 하나 따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던 마물사가, 첫 심사에서 곧바로 A등급을 받아낸 셈이었다. 그것도 그냥 A등급이 아니라 지부 개설 이래 마물사 최고 기록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어서. '...개사긴데?'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감독관이 나를 향해 뭔가 물어보고 싶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표정에는 순수한 궁금증과, 동시에 이걸 어떻게 보고서에 적어야 하나 싶은 곤란함이 섞여 있었다. "저... 실례지만, 방금 사용한 그 방식은..." "마물 포획해서 전투에 활용한 거요" 하고 내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직업 설명서에 있던 대로 한 것뿐인데요." 그건 사실 절반의 거짓말이었다. 설명서 어디에도 마물을 무기처럼 던지라는 문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규정 위반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지점이었고, 감독관도 그걸 눈치챘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물러갔다. 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서류에 뭔가를 적어넣는 걸로 대신하고는 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계산을 다시 해봤다. A등급이면 60일 자격 유예 조건은 완전히 해결된 셈이었고, 이제 남은 건 이 성장 속도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이게, 되네...?' 하는 얼떨떨한 감상이 먼저 들었지만, 곧이어 더 냉정한 계산이 뒤따랐다. 이 정도로 눈에 띄는 기록을 세웠으니, 조만간 누군가 이 결과를 유심히 들여다볼 게 분명했다. 협회라는 조직이 원래 그런 곳이라는 걸,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소연이 결과를 확인하러 나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서류철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 서류철을 넘기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A등급... 확인했습니다." 그녀가 서류를 넘기며 말했는데, 목소리에 놀람과 의구심이 반쯤 섞여 있었다. "마물사로 이 정도 기록은, 정말 처음 봅니다." "운이 좋았나 봐요" 하고 내가 대충 넘기려 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는 서류철을 덮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는데, 그 시선이 꽤 오래 머물렀다. "운으로 이런 결과가 나오진 않습니다. 이준호 씨." 그녀가 내 이름을 정확히 짚어 부르며 말을 이었다. "본부에서 이 결과에 대해 별도로 검토할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검토라면...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였다. "직업 특성상 이례적인 성과가 나오면, 본부 쪽에서 방식이나 스킬 운용에 대해 따로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 그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는데, 그 끊김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검토'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서운 뜻으로 들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제까지는 그냥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아남는 게 목표였는데, A등급이라는 결과 하나로 그 계획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셈이었다. '더럽게 쓸모없네...' 하는 자조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잘 해낸 게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니, 이 바닥의 룰은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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