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최약체 마물사의 역주행

1화

내 이름은 이준호. 스물두 살, 4년제 경영학과 졸업, 자격증 세 개, 공백기 없음. 이력서 스펙만 보면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는데, 정작 서류에서 떨어진 횟수가 서른일곱 번이었으니 스펙이라는 게 참 허무한 숫자라는 걸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요컨대 나는 취업에 실패한 게 아니라 취업 시장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았고, 그 서른일곱 번째 통보 메일을 받은 날 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계란 한 알도 없다는 사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이 헛웃음인지 실성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준비된 건 하나도 없는데 이름은 준호라는 게, 그날은 유독 웃겼다. 생각해보면 서른일곱 번이라는 숫자도 우습다. 서류에서 떨어질 때마다 나는 나름의 통계를 냈다. 어느 요일에 메일이 오는지, 어떤 문구로 시작하는지, "귀하의 소중한 경험은" 다음에 어떤 접속사가 붙는지까지. 그렇게 서른일곱 개의 데이터를 모으고 나니 알게 된 사실은 단 하나였다. 나는 통계에 넣을 가치조차 없는 표본이라는 것. 그 결론에 도달한 날 밤, 계란도 없는 냉장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른 길을 생각했다. 던전관리협회에 등록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뉴스에서 탐험가 등록만 하면 기본 생계 수당이 나온다는 자막을 봤고, 그 수당이 내가 이번 달 월세보다 많다는 계산이 섰을 뿐이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월세는 육십만 원, 생계 수당은 팔십만 원. 이십만 원의 흑자. 그 이십만 원이면 계란도 사고, 라면도 사고, 어쩌면 치킨도 한 마리 시켜 먹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강남지부 협회 건물 앞에 섰을 때, 유리문에 붙은 커다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탐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절하게 배웠다. 건물 안은 예상보다 붐볐다. 대기표를 뽑고 앉아 있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각성 결과를 받고 "검사"라는 문구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방 뛰는 걸 봤고,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궁수" 판정을 받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기쁨의 눈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 광경들을 보며 괜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도 저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남들 앞에서 웃을 수 있는 결과는 나오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 낙관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었는지, 그날의 나는 전혀 몰랐다. 접수창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내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등록 절차는 간단합니다. 이 수정구에 손을 올려주시면 됩니다" 하고 그녀가 사무적인 어조로 안내했는데, 명찰에 한소연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하며 손을 뻗었고, 수정구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자 뭔가 대단한 게 벌어지는 느낌이 들어 괜히 어깨를 폈다. 수정구 표면에 손금처럼 얇은 빛의 선들이 스멀스멀 퍼져 나가는 모습이, 마치 내 인생의 남은 가능성을 스캔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그냥 각성 판정 시스템이었겠지만.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직업 배정을 시작합니다...] 그 문구가 뜨는 순간까지도 나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검사, 마법사, 하다못해 궁수라도 되면 그럴싸한 스타트업 명함이라도 파는 기분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딱히 근거 없는 낙관이었다. 옆에서 방방 뛰던 남자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었을 수도 있다. [배정 직업: 마물사] ... 나는 그 세 글자를 세 번쯤 다시 읽었다. 마물사. 마법사와 한 글자 차이인데 이렇게까지 실망스러울 수가 있나 싶었는데, 한소연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살짝 곤란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마물사는 마물을 포획하고 조교해서 전투나 채집에 활용하는 직업입니다. 다만..." 그녀가 잠시 말을 끌었다가 이어갔다. "현재 강남지부 등록 탐험가 중 최하위 선호 직업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최하위요?" 하고 내가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직업별 평균 소득 그래프가 떠 있었는데, 마물사 항목의 막대그래프가 다른 직업들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높이로 눌어붙어 있었다. 검사는 월 평균 삼백, 마법사는 이백팔십, 궁수는 이백사십... 그렇게 쭉 내려가다가 맨 아래,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얇은 선 하나가 마물사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서른일곱 번째 탈락 통보 메일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존재감이 없는 자리에 배정된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는, 묘하게 딱 맞아떨어지는 조합이었다. "혹시 재배정 같은 제도는 없나요?" 하고 내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물었다. 한소연은 이번에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서류철을 뒤적였다. "각성 직업은 시스템이 판정하는 것이라 협회 차원에서 재배정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드물게 재각성 이벤트를 통해 직업이 변경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그건 확률이 워낙 낮아서..." 그녀가 말끝을 흐렸고, 나는 그 흐려지는 말끝에서 이미 결론을 읽었다. 낮은 확률이라는 말은, 대개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짜 절망은 그 다음에 왔다. [신규 등록 탐험가에게 안내드립니다.] [강남지부 규정에 따라, 신규 탐험가는 등록일로부터 60일 이내 최소 F등급 이상의 공식 심사 기록을 제출해야 합니다.] [미달 시 탐험가 자격이 자동 박탈되며, 등록 시 지급된 생계 지원금은 전액 환수됩니다.] 나는 그 문구를 읽고 나서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취업에 실패한 백수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동아줄이 시한부 판정을 내려버린 셈이었으니까. '이건 무슨 아이러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러니든 뭐든 60일이라는 숫자는 냉정하게 흘러갈 예정이었다. 환수라는 단어가 특히 마음에 걸렸다. 이미 받은 돈을 다시 뱉어내야 한다는 건, 없던 빚이 새로 생긴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거, 다른 직업들도 다 똑같이 적용되는 규정인가요?" 하고 내가 묻자, 한소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동일 규정이지만, 다른 전투 계열 직업들은 F등급 정도는 초심자 던전 한 번으로도 대부분 통과합니다. 문제는..." "마물사는 아니라는 거죠." "...네." 그녀가 짧게 대답했고, 나는 그 짧은 대답 속에서 이미 확정된 사망 선고를 읽어냈다. "그럼 마물사가 F등급을 통과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가요?" 하고 다시 물었다. 이건 순전히 살아남기 위한 질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마물 한 마리 이상을 포획한 상태로 심사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포획 없이는 심사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태블릿을 몇 번 더 두드리더니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초심자 던전에 등장하는 마물들의 평균 체력을 보면... 포획 조건인 30% 이하까지 낮추려면 최소한의 전투력이 필요합니다." "근데 저는 전투 스킬이 하나도 없잖아요." "...네." 이번에도 같은 대답이었고, 나는 그녀가 이 대화에서 몇 번이나 저 짧은 부정을 반복하게 될지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협회가 사람을 뽑아놓고, 그 사람에게 가장 불리한 도구를 쥐여준 다음, 60일 안에 그 도구로 뭔가를 해내라고 시한부를 매기는 구조라는 게. 회사에서도 이랬으면 노동청에 신고했을 텐데, 이곳은 판타지 세계의 룰이라는 이유로 이 모든 게 아무렇지 않게 정당화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마물사가 정확히 뭘 할 수 있는 직업인지도 몰랐으니, 그것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였다. 상태창을 열어보니 스킬란에 딱 하나의 항목만 떠 있었다. [스킬: 포획의 손길 (Lv.1)] [설명: 대상 마물의 체력이 30% 이하일 때, 일정 확률로 마물을 포획하여 아군으로 편입시킵니다.] 그 밑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격 스킬도, 방어 스킬도, 하다못해 도망칠 때 쓸 회피 스킬조차 없었다. 있는 거라곤 다 죽어가는 마물을 주워 담는 능력 하나뿐이었는데, 이걸로 어떻게 60일 안에 F등급 심사를 통과하라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상태창을 몇 번이나 껐다 켰다 하면서, 혹시 숨겨진 항목이 하나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봤지만, 창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떠 있었다. 스킬 한 줄, 그 밑으로 광활한 여백. 마치 내 이력서의 자기소개서 칸처럼, 채울 게 없어서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저기, 실례지만" 하고 내가 한소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마물사로 F등급 심사를 통과한 선례가 있긴 한가요?" "...기록상으로는, 있습니다." 그녀가 대답했지만, 그 대답의 뒤에 붙은 침묵이 심상치 않았다. "다만 그 선례가 남긴 후기가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후기였는데요?" "그건..." 그녀가 잠깐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화면을 내게 보여주지 않고 다시 내렸다.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다는 말이, 오히려 내 머릿속에서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죽었을까. 크게 다쳤을까. 아니면 그냥 자격을 박탈당하고 조용히 사라졌을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결말은 아닐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무슨 함정에 걸어 들어왔는지 실감했다. 취업 실패자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동아줄이, 알고 보니 시한부 판정과 함께 밑동부터 썩어 있던 줄이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60일. 그 숫자가 이제 막 내 머리 위에 시계 초침처럼 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협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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