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판정 센터를 나선 태민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 창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손끝의 저릿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판정실에서 느꼈던 그 감각, 낮게 울리던 웅— 소리의 잔상이 아직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태민은 자신이 방금 겪은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신분증을 손에 쥐고 이불 속에 누웠다. 천장을 보며 몇 번이고 카드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각성자. 그 두 글자가 낯설었다. 등록금을 날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밤들,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며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던 시간들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손에 들린 이 얇은 카드 한 장이 모든 걸 바꿔놓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판정실의 하얀 벽과 서라윤의 얼굴, 그리고 손끝에서 울리던 그 소리가 번갈아 떠올랐다.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지 셀 수 없었다. 창밖이 밝아올 때쯤에야 겨우 얕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눈을 떴다. 각성자 신분증을 손에 쥐고 밤새 뒤척였던 탓에 눈이 뻑뻑했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마치 밤새 어딘가를 헤매고 온 것 같은 피로감이었다.
거실로 나가자 여동생 강지은이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고 있었다. 우유가 담긴 그릇에서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가 들렸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밤새 뭐 했어."
지은이 숟가락을 든 채로 태민을 훑어보았다. 눈 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말하면 안 믿을 거야."
태민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밤새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뭔데 그래. 궁금하게."
지은이 시리얼 그릇을 밀어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태민은 잠시 망설였다. 말을 해도 되는 걸까. 판정 센터에서 받은 안내에는 각성 사실을 함부로 공개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은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태민은 신분증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지은이 그것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눈동자가 빠르게 카드 위를 훑고 지나갔다.
"각성자? 진짜?"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어. 진짜야."
"헐, 오빠가? 진짜 오빠가?"
지은은 신분증을 다시 읽었다. 이름, 등급, 스킬명. 한 줄씩 짚어가며 읽던 지은의 눈이 스킬명에서 멈췄다. 그러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손가락 스냅? 이게 스킬이야? 진짜 웃기다."
지은이 손가락을 튕기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어깨까지 흔들며 웃는 모습에 태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만 놀려."
"아니 진짜, 뭐 다른 사람들은 불 뿜고 얼음 만들고 그런다는데 오빠는 손가락 스냅이라니. 이거 무슨 마술사 각성한 거 아니야?"
"몰라,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나왔어."
태민은 신분증을 다시 뺏어갔다. 지은은 계속 킥킥거리며 시리얼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런데 오빠, 이거 아까 우체통에서 온 거야."
지은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두꺼운 재질의 봉투였다. 겉면에 국립던전관리청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로고는 방패 모양 안에 검이 세워진 형태로, 태민이 어제 판정 센터에서 본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이게 뭔데?"
"초대장인가 봐. 오빠 이름으로 왔어. 아침에 우체통 열어보니까 딱 이거 한 장만 들어있더라고."
태민은 봉투를 받아들었다. 두께가 제법 있었다. 안에 뭔가 여러 장이 들어있는 게 손끝으로도 느껴졌다.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카드 한 장과 서류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카드는 두툼한 재질에 금박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국립던전관리청 신규 각성자 오리엔테이션 초대장]
[일시: 3일 후 오전 10시]
[장소: 국립던전관리청 본청 5층 자료실]
"오리엔테이션이라니."
태민은 서류를 펼쳤다. 신규 각성자를 위한 안내문이었다. 각성자 등급별 혜택, 스킬 등록 절차, 정기 검진 일정 같은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평범한 행정 서류처럼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낯선 서류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오래된 종이 재질에, 손으로 쓴 듯한 글자들이었다. 종이의 색이 다른 서류들과 확연히 달랐다. 누렇게 변색된 가장자리, 접힌 흔적이 여러 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보관되어 있던 것 같았다.
[스킬 이상 반응 관측 기록]
[대상 코드: SN-002, SN-004]
[공통 특이사항: 각성 직전 저주파 신호 감지. 판정 중 수치 요동. 실종 또는 기록 삭제.]
[비고: 세 번째 사례 발생 시 상위 보고 필요]
태민의 손이 굳었다.
세 번째 사례.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목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오빠, 왜 그래."
지은이 물었다. 태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거... 이거 어디서 났어?"
"몰라. 그냥 봉투에 같이 있었어. 나도 봤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
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거 좀 이상하게 생겼더라. 다른 서류는 다 새 종이인데 그거 하나만 되게 낡았잖아. 우체국에서 잘못 넣은 거 아니야?"
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다시 읽었다. SN-002, SN-004. 서라윤이 말했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한 명은 실종. 한 명은 기록 삭제. 어제 판정실에서 서라윤이 흘리듯 언급했던 이름들이었다. 그때는 그저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 서류와 정확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세 번째였다.
"세 번째 사례 발생 시 상위 보고 필요."
이 문구가 계속 눈에 밟혔다. 누가 이 서류를 초대장 안에 끼워넣었을까. 실수일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그에게 보낸 것일까.
태민은 서류를 손에 들고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눈으로 짚어가며 되새겼다. 저주파 신호. 판정 중 수치 요동. 그건 정확히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판정 도구가 흔들리고, 화면이 요동치고, 서라윤의 얼굴이 굳었던 그 순간.
태민은 서류 아래 작은 서명을 발견했다.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이니셜이었다.
박.
미스터 박이었다.
판정 센터 복도에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그 이름. 서라윤이 그 이름을 언급할 때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던 것도 기억났다.
"미스터 박이... 나한테 이걸 보낸 건가."
태민은 낮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지은이 다시 물었지만 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이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서류를 보낸 걸까. 경고인가, 아니면 정보를 알려주려는 걸까. 만약 경고라면,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일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국립던전관리청 앱에서 온 알림이었다. 진동이 짧게 두 번 울리고 화면이 켜졌다.
[데일리 미션이 갱신되었습니다.]
[오늘의 미션: 동네 반경 1km 내 저등급 몬스터 흔적 3회 발견하기]
[보상: 경험치 10, 코인 500]
태민은 그 알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제까지는 미션이 없었는데, 오늘은 첫 미션이 뜬 것이다. 앱을 처음 설치했을 때는 텅 비어있던 화면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구체적인 미션이 생성되어 있다는 게 낯설었다.
"오빠, 뭔데?"
지은이 화면을 넘겨보려 했다. 태민은 얼른 휴대폰을 가렸다.
"별거 아니야. 나 나가봐야 돼."
"아침도 안 먹고?"
"이따 먹을게."
태민은 서류와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 넣고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으며 계속 생각했다. 세 번째 사례. 실종. 기록 삭제.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일까.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 입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문구로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느껴지는 감정도 있었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감각.
등록금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인생에, 처음으로 방향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태민은 신분증과 서류를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기 전, 거실에서 지은이 다시 시리얼 그릇을 붙잡고 뭔가 물어보려는 걸 못 들은 척 흘렸다.
동네 골목을 걸으며 앱을 다시 확인했다. 미션 화면 아래, 작은 지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 점 세 개가 동네 곳곳에 찍혀 있었다. 지도는 실시간으로 태민의 위치를 표시하며 조금씩 움직였다.
첫 번째 점은 놀랍게도 집 근처 놀이터였다. 매일 지나다니던 그 놀이터. 어릴 때 지은과 함께 미끄럼틀을 타던 곳이었다. 그런 익숙한 장소에 몬스터의 흔적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태민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끝이 왠지 저릿했다. 어제 판정을 받을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저릿함도 조금씩 강해지는 것 같았다.
골목을 벗어나 놀이터 입구에 다다르자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느꼈다. 평범한 아침 공기였는데, 어딘가 축축하고 무거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시간이라 아이들도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놀이터에 도착하자,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미끄럼틀 아래 그늘진 곳에,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었다. 윤곽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마치 검은 안개가 뭉쳐져 형체를 이룬 것 같았다.
숨을 멈췄다.
그림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형체가 흐릿했지만, 두 개의 붉은 눈이 태민을 향해 켜졌다. 눈이라기보다는 붉은 점 두 개가 어둠 속에서 떠오른 것 같았다.
앱에서 진동이 울렸다.
[저등급 몬스터 감지]
[등급: F]
[전투 권장 등급: F 이상]
"F등급... 나도 F등급인데."
태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스냅. 상대를 놀라게 하고 자신의 체력을 소모하는 스킬. 이걸로 저 그림자를 상대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판정실에서 서라윤이 설명해줬던 스킬 정보를 떠올려 봤지만, 실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
그림자가 스르륵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치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태민은 뒷걸음질을 쳤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발밑에서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제 판정실에서 봤던 서류의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세 번째 사례 발생 시 상위 보고 필요.
혹시 그 보고라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실종된 SN-002. 기록이 삭제된 SN-004. 그 두 사람도 이렇게 첫 번째 몬스터를 만났을까. 그리고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림자의 붉은 눈이 더 가까워졌다. 미끄럼틀의 그늘을 벗어나 놀이터 한가운데로 나온 그림자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도 형체가 뚜렷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태민은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튕길 준비를 했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지, 아니면 그냥 손가락 한 번 튕기고 끝나버릴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그림자가 마지막 거리를 좁혀오는 순간, 태민의 손끝에서 낮은 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판정실에서 들었던 그 소리와 똑같은 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