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딱, 하루치의 기적

2화

판정실은 조용했다. 형광등 불빛이 하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딘가 먼 곳에서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웅웅거렸다. 태민은 하얀 침대 같은 판정대 위에 누워 있었다. 팔목과 이마에 차가운 패드가 붙었다. 패드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냉기는 피부를 지나 뼈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심장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방 안에 울렸다. 두근. 두근.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크고 낯선 소리였다. 태민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천장의 조명이 눈을 찔렀다. 미스터 박이 옆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흰 가운, 정돈된 머리, 손목에 찬 얇은 시계.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정갈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떨지 마라. 죽지 않는다." "이게 뭔지 설명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태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야? 몇 시간 전에 신호를 받았을 텐데." 태민은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웅— 하는 울림. 방 안을 채웠던 그 소리. 미스터 박은 그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 생각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각성입니다." 미스터 박이 짧게 말했다. "몸속에 잠재된 힘이 발현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지. 지구상에 그런 신호를 받는 사람은 매년 극소수야. 대부분 평생 아무 신호도 없이 죽는다." "그럼 저는... 특별한 겁니까?" "특별한 게 아니라, 선택받은 거다. 다르지." 미스터 박은 태블릿을 두어 번 두드렸다. 화면에 알 수 없는 숫자와 그래프가 스쳐 지나갔다. "저는 그냥... 등록금을 잃고, 형한테 배신당하고, 그러다가..." 태민은 말을 멈췄다. 사실을 다 털어놓기가 부끄러웠다. 그날 밤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떠올랐다.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 형의 문자. 답장 없는 전화. 그리고 옥상의 바람. 미스터 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패드를 붙였다. 패드가 쇄골 아래에 닿는 순간, 태민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사실 태민은 그날 밤 한 가지를 더 하려고 했다. 신호를 느끼기 직전, 방 안 옥상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난간은 차가웠고, 손바닥에 그 냉기가 그대로 배어들었다. 도시의 불빛이 저 아래 흩어져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던 순간이 있었다. 발끝이 난간 바로 앞에 있었고,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었던 그 짧은 순간이 있었다. 그다음 순간 웅— 하는 울림이 그를 덮쳤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때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태민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판정 시작한다." 미스터 박이 태블릿의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에 숫자가 떠올랐다. [각성 적성 검사 개시] [대상: 강태민] [상태: 측정 중...] 태민의 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뜨거운 물이 혈관을 대신 채우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었다. "참아라. 이 과정에서 힘이 형태를 갖춘다." 미스터 박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뭉개져 있었다. 스크린의 숫자가 요동쳤다. 100. 50. 300. 10. 숫자는 안정되지 않고 계속 흔들렸다. 미스터 박의 눈이 스크린과 태민의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이상하군." 미스터 박이 미간을 좁혔다. "보통 이렇게까지 불안정하지 않은데." 옆방에서 다른 판정관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흐릿하게 들려왔다. 다른 대상자의 판정이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는 태민의 귀에 닿았다가 곧 사라졌다. 태민의 몸속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지나갔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앞에 다시 그 문양들이 떠올랐다. 점. 선. 물결. 탑. 각 문양이 나타날 때마다 스크린의 숫자가 크게 뛰었다. 문양이 나타날 때마다 태민의 몸이 활처럼 팽창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손끝이 저릿했고, 관자놀이 뒤편에서 무언가 두드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미스터 박은 그것을 보며 숨을 멈췄다. 다른 판정관들은 그저 데이터 오류라고 생각했다. 벽 너머에서 누군가 "또 시스템 문제야?"라고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미스터 박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저 문양들의 조합.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전설과 겹쳐지는 패턴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놀라움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는 오래전에 읽었던 오래된 문서 한 장을 떠올렸다. 점과 선과 물결과 탑. 그 네 가지가 순서 없이, 그러나 반드시 함께 나타난다는 기록.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문서를 쓴 사람이 마지막 문장에 남긴 말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조합을 본 자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판정 중단해." 미스터 박이 갑자기 소리쳤다. 스크린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판정 오류 발생] [재시도 필요] 경보음 비슷한 저음이 짧게 울렸다가 뚝 끊겼다. 방 안의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이게 뭡니까." 태민이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눕혀졌다. 손끝에 통증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저릿한 감각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별거 아니다. 시스템이 잠깐 삐끗한 것뿐이야." 미스터 박은 그렇게 말했지만, 태블릿을 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태블릿을 꽉 쥐고 있었다. 태민은 그 떨림을 보지 못했다.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아직도 스피커를 통해 두근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방금 전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태민 자신도 알고 있었다. "몇 시간 쉬었다가 재시도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미스터 박이 패드를 하나씩 떼어냈다. 패드가 떨어질 때마다 피부에 남은 냉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나 몸속에 남은 뜨거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태민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이 여전히 저릿했다.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저... 이거 잘못되면 어떻게 되나요?" 미스터 박이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운이 없으면 최약체 스킬 하나를 받는다. 그게 최악의 경우야." "그럼 운이 좋으면요." "운이 좋으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미스터 박의 시선이 태민의 가슴 쪽을 향했다. 여전히 희미한 빛이 옷 속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빛이었다. 태민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지만, 그가 보는 것과 미스터 박이 보는 것은 분명 달랐다. "뭘 보고 계신 겁니까." "아무것도." 미스터 박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거뒀다. 너무 빠르게 거둔 시선이었다. "휴식실로 안내하겠다. 따라와." 미스터 박이 앞장서 걸었다. 태민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애써 따라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복도를 걸으며 태민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았다. 각성자들의 기록이었다. 화염을 다루는 사람, 하늘을 나는 사람, 거대한 방패를 든 사람. 각 사진 아래에는 짧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등록 번호, 각성 등급, 그리고 대표 스킬 이름. 다들 눈빛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한 사진 속 남자는 불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불꽃이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진 속 여자는 공중에 떠서 미소 짓고 있었다. 발밑에 그림자가 없었다. 태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가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믿기지 않았다. 손바닥에는 여전히 저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고, 손가락 끝은 아직도 차가웠다. "저 사람들도 처음엔 다 이랬습니까?" 태민이 물었다. 미스터 박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다들 처음엔 이랬지. 겁먹은 얼굴로 여기를 걸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사진으로 남는 거고." "그럼 저는 뭐가 될까요."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휴식실 문 앞에서 미스터 박이 걸음을 멈췄다. "하나만 물어보지." "네?" "오늘 밤, 신호를 받기 직전에 뭘 하고 있었나." 태민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옥상의 차가운 난간이, 발끝이 기울었던 그 순간이 눈앞에 다시 떠올랐다. "그냥... 창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것뿐인가?" 태민은 눈을 피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미스터 박은 그의 눈빛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태민은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미스터 박이 그날 밤의 모든 순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간의 냉기, 도시의 불빛, 그리고 발끝이 기울었던 그 짧은 순간까지도. "들어가서 쉬어라. 판정은 세 시간 후에 재개한다." 문이 닫혔다. 태민은 휴식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침대는 판정대보다는 조금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소독약 냄새가 배어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이었다. 벽시계만이 초침 소리를 조용히 내며 시간을 갈아먹고 있었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미스터 박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이상했다. 단순한 신규 각성자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혹은 뭔가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떠올릴수록 태민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각성자들처럼 사진 속에서 웃는 얼굴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저 붉은 오류 화면처럼 무언가 잘못된 채로 남게 될지. 손목에 남은 패드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자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서늘한 감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문득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표정.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돌아섰던 뒷모습. 등록금이 든 통장이 텅 비었던 그 밤. 그리고 옥상.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다시 웅— 하는 소리에 밀려 사라졌다. 세 시간 뒤, 판정이 재개되면 자신이 무엇을 얻게 될지 태민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최약체 스킬일지, 아니면 세상을 바꿀 무언가일지.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태민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에서 점과 선과 물결과 탑이 다시 천천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창밖 어딘가에서, 웅— 하는 낮은 울림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사라졌다. 이번엔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판정실 밖 복도, 붉은 비상등 아래 서 있던 미스터 박만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태민이 누워 있는 휴식실 문을 향해 있었다. 손에 쥔 태블릿 화면에는 여전히 [재시도 필요]라는 문구가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떠 있던 문구 하나를, 미스터 박은 오래도록 지우지 않고 바라보았다. [유사 사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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