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딱, 하루치의 기적

4화

인증실은 판정실보다 훨씬 작았다. 판정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태민은 발밑 타일의 감촉을 느꼈다. 차가운 대리석.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문들에는 번호만 붙어 있었다. 인증실 3호. 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문을 열자 좁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하나, 컴퓨터 한 대, 그리고 벽에 걸린 국립던전관리청의 로고가 전부였다. 판정실처럼 화려한 장비도, 위압적인 조명도 없었다. 그저 사무실 같은 느낌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조금 낮게 깔려 있어서, 오히려 편안한 인상을 줬다. 태민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큰 눈, 그리고 목에 걸린 직원증에는 '서라윤'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원증 사진 속 얼굴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 보였다. "강태민 씨죠?" 서라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밝았다. "네." "자리에 앉으세요. 스킬 등록 절차 진행할게요." 태민은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판정실의 그것과 달리 평범했다. 등받이가 조금 삐걱거렸다. 서라윤은 컴퓨터 화면을 몇 번 클릭하더니,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마우스를 쥔 손끝이 화면 위를 몇 번 오갔다. 뭔가를 다시 확인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어... 손가락 스냅?" "네. 그거 맞아요." 태민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서라윤은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뭔가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F등급 맞고... 효과는 상대 놀라게 하고 체력 소모하는 거고." "제가 봐도 이상한 스킬이에요." 태민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서라윤은 웃지 않았다. 화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우스 클릭 소리가 두어 번 이어졌다. "이상하네요." "네? 뭐가요." "이 스킬... 등록된 지 5년 동안 딱 두 번 나왔거든요." 태민은 그 말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두 번이나 있었어요? 저 말고도요?" "네. 그런데..." 서라윤이 잠시 말을 멈췄다.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이 조심스러워졌다. 손끝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멈추더니,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 다 초기 판정에서는 등급 판정이 불안정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어요. 판정 도중 수치가 요동쳤다는 메모도 있고." 태민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미스터 박이 판정을 중단시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손끝이 저절로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저도... 판정 도중에 한 번 중단됐어요." 서라윤의 눈이 커졌다. "중단됐다고요? 그건 보통 시스템에 안 뜨는데." 그녀는 다시 화면을 클릭했다. 관련 로그를 찾는 듯했다. 화면을 위아래로 몇 번이나 스크롤했다. 그러나 아무리 클릭해도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판정 중단 기록이 없어요." 그녀는 키보드로 몇 개의 단어를 입력했다. 커서가 깜빡였다. 검색 결과는 여전히 없었다. "미스터 박이 직접 중단시켰어요. 두 시간쯤 전에." 서라윤은 그 이름을 듣자 잠시 멈칫했다. 손이 마우스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박 선생님이... 직접이요?" "네. 뭐 잘못됐나요?" 서라윤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풀었다. "박 선생님이 신규 각성자 판정에 직접 개입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에요. 보통은 자동 시스템이 처리하거든요. 5년 동안 제가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예요." 태민은 그 말을 듣고 다시금 미스터 박의 이상했던 표정을 떠올렸다. 판정이 끝났을 때, 그가 보였던 복잡한 얼굴. 그리고 지워진 로그. 그 순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저기... 이전에 이 스킬 받았던 두 사람,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나요?" 서라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넘겼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결심한 듯 몇 개의 키를 눌렀다. "한 명은... 3년 전에 실종 처리됐어요. 던전 탐사 중 실종. 시신도 못 찾았고요." 태민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한 명은요?" "기록이... 삭제돼 있어요. 이름도, 사진도, 전부." 태민은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목덜미의 털이 서는 감각이었다. "삭제됐다고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요?" "국립던전관리청 내부에서만 가능한 일이에요. 상위 권한이 있는 사람만." 서라윤은 화면을 끄고 태민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걱정과 궁금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책상 위에 얹혀 있었지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태민 씨, 이거 좀 조심스러운 얘기긴 한데..." "네." "손가락 스냅이라는 스킬 자체는 진짜 최약체가 맞아요. 효과도 딱 설명대로고요. 그런데 이 스킬을 받은 사람들한테는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공통점이요?" 서라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자기도 모르게 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판정 수치가 불안정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것." 태민은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유난히 마른 느낌이었다. "이상한 일이라는 게 뭔데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기록이 애매하게 남아 있어서요." 서라윤은 다시 화면을 켰다. 이번엔 좀 더 오래된 파일을 찾는 듯했다. 스크롤이 몇 번 더 내려갔다. "실종된 사람 마지막 로그에... '신호가 다시 들렸다'는 메모가 있었어요. 정확한 시각까지 적혀 있는데, 그다음부턴 아예 기록이 끊겨요." 태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신호. 그 웅— 하는 울림. 그가 각성을 얻기 직전에 들었던 그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웅— 머릿속에서 다시 그 소리가 재생되는 것 같았다. 태민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쥐었다. "저도... 그 신호, 알아요. 각성 전에도 들었고, 방금 판정 받는 동안에도 들렸어요." 서라윤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진짜요?" "네. 웅— 하는 소리. 방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서라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뭔가 결심을 하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정식 절차로 보고해야 할 사항 같아요. 그런데..." "그런데요?" "박 선생님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보다 훨씬 오래 이 일을 하셨거든요."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서라윤이 미스터 박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목소리 톤이 아주 조금씩 낮아졌다. "저... 박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세요?" 서라윤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눈동자가 순간 다른 곳을 향했다. "조금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뭔가 감추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손끝이 마우스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태민이 더 물으려는 순간, 인증실 문이 벌컥 열렸다. 미스터 박이 들어섰다. 표정이 심각했다. 걸음걸이도 평소보다 빠르고 무거웠다. "등록 다 끝났나." 서라윤이 재빨리 화면을 닫으며 대답했다. 손이 눈에 띄게 서둘렀다. "거의요. 마지막 확인만 하면 돼요." 미스터 박의 시선이 서라윤을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래 알아온 사람들 사이의 그 익숙한 긴장감 같은 것이었다.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태민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두 분... 정말 아는 사이시구나." 미스터 박이 태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등록 끝나면 신분증 받고 나가라. 오늘은 여기까지다." 대답을 피하는 말투였다. 태민은 더 캐물을 수 없었다. 뭔가 더 물으려던 말이 목구멍 안에서 그대로 멈췄다. 서라윤이 컴퓨터에서 카드 하나를 뽑아 태민에게 건넸다. 각성자 신분증이었다. 카드는 얇았지만, 손끝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단단했다. 사진 아래에 이름과 등급, 그리고 스킬명이 새겨져 있었다. [강태민 / 각성자 등급 F / 스킬: 손가락 스냅] 글자들은 작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 아래 있는 QR코드 같은 무늬가 신경 쓰였다. 어딘가 낯선 문양처럼 보였다. 태민은 그 카드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받으면 이제 뭘 하나요?" "국립던전관리청에서 매일 갱신되는 미션이 있어요. 등급이 낮아도 참여할 수 있는 초급 미션들. 그거 하면서 경험치를 쌓으면 돼요." 서라윤이 설명했다. 목소리는 평소의 밝은 톤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조금 전의 긴장은 여전히 눈가에 남아 있었다. "미션이요?" "자세한 건 앱으로 확인하세요. 신분증 등록하면 자동으로 알림이 올 거예요." "고맙습니다." 태민은 신분증을 주머니에 넣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방금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실종. 삭제된 기록. 신호. 세 가지 단어가 서로 얽혀 어떤 그림을 만들려 했지만,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문을 열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미스터 박과 서라윤이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표정만은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방금 전보다 훨씬 심각한 얼굴이었다. 서라윤이 뭔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미스터 박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태민은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아까와 똑같았다. 차가운 타일, 낮은 조명, 번호가 붙은 문들. 그런데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세상이 조금 전과는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손안에 쥔 신분증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F등급, 최약체 스킬.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이 카드가 그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눈을 찔렀다. 태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리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방금 겪은 일을 알지 못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국립던전관리청 앱에서 온 첫 알림이었다. [데일리 미션이 갱신되었습니다.] [오늘의 미션: 없음] [다음 갱신까지: 23시간 59분] 태민은 그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미션이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다른 각성자들은 매일 미션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자신에게만 아무것도 뜨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걸까. 화면을 몇 번 더 눌러보았다. 새로고침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미션 없음. 그 세 글자만 화면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었다. 그때, 화면 아래 작은 글자 하나가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관측 대상: 강태민 — 로그 기록 중] 태민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화면은 이미 다음 순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한번 신분증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태민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도 판정실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순간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아래 깔려 있던, 설명할 수 없는 낯선 향. 지금 이 거리의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그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국립던전관리청 건물이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방금 나눈 대화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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