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킨 영혼의 무게

4화

챔피언의 포효가 끝나자,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각각 흩어졌던 놈들이 하나의 흐름처럼 움직인다. 마치 지휘를 받는 병사들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각자 눈에 보이는 먹잇감에게 달려들던 놈들이, 이제는 서로 거리를 맞추고 대각선으로 겹쳐 선다. 누가 봐도 짜인 진형이었다. "진형 무너뜨려야 합니다!" 강민석이 소리치며 챔피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일반 고블린 셋이 그의 앞을 막았다. 셋이 동시에, 마치 미리 합의한 것처럼 좌우와 정면에서 파고들었다. 카앙, 카앙! 검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강민석의 발이 조금씩 뒤로 밀린다. 이 사람도 밀리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늘 씨, 챔피언한테 화살!" 그가 외쳤다. 김하늘이 활을 당겼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그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피융— 화살이 챔피언을 향해 날아갔지만, 놈이 손을 들어 막았다. 화살이 손등에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화살이 땅에 꽂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안 통해요!" 그녀의 목소리에 당황이 섞였다. "뿔이랑 손등, 갑각화 됐나 봐요! 다른 데를 노려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이 터졌다. 그때, 오태준이 무너졌다. "악!" 다리에 창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방패를 놓친 그의 몸이 그대로 노출됐다. 방패가 바닥을 구르며 텅, 텅, 소리를 냈다. 고블린 하나가 창을 들어 그를 향해 내질렀다. "태준 씨!" 박서연이 달려갔지만 너무 멀었다. 팔의 상처 때문에 발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 게 보였다. 저러면 못 막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판단을 내렸다. 나도 몸을 던졌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칼을 들어 창을 막았다. 카앙! 손목이 저릿하게 떨려온다. 힘이 밀린다. 놈의 힘이 나보다 세다.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버텨야 한다. 뒤에 오태준이 있으니까. 그 순간, 다시 가슴 속 그 뜨거운 감각이 폭발했다. 전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하지만 훨씬 더 선명한 열기였다. "으아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유니크 스킬 '혼식(魂食)' — 조건 충족, 발동] 낯선 문구가 시야 한가운데 떠올랐다. 동시에, 눈앞의 고블린이 순간 흐릿해졌다. 놈의 형체가 마치 물에 풀리는 잉크처럼 일렁였다. 놈의 힘과 속도가, 어떤 형태로,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무언가가 빠르게 채워지는 느낌. [대상의 능력치 10%를 흡수합니다.] [대상의 스킬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창격 강타 - 하급] 몸이 가벼워졌다. 아니, 놈이 약해진 거다. 밀리던 힘의 균형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칼끝을 통해 전달되던 압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뭐야, 이게." 나조차 놀랐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칼을 밀어붙여 놈의 창을 걷어냈다. 서걱. 한 번의 반격으로 놈이 쓰러졌다. 쓰러지는 놈의 눈에서 빛이 꺼지는 걸 봤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오태준은 아직 바닥에 쓰러진 채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끝이 살을 깊게 파고든 모양이었다. "윤성 씨! 여기!" 내가 소리쳤다. 최윤성이 달려와 오태준의 상처에 손을 댔다. 초록빛이 흘렀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더 오래 걸렸다. 빛이 상처 주변을 몇 번이나 맴돌다가야 겨우 지혈이 됐다. "상처가 깊어요. 지혈만 겨우—" 최윤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상은 여기서 힘들어요.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해요." 전황을 다시 살폈다. 강민석은 여전히 세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지쳐가는 게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박서연은 팔의 상처 때문에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하늘은 화살통이 거의 비어가고 있었다. 남은 화살을 세어보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남은 고블린은 여덟. 그중 챔피언 하나. 다섯 중 둘이 전투 불가에 가까웠다. 이거 안 되겠다.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대로면 다 죽는다. 숫자를 세어봤다. 우리 다섯, 저쪽 여덟.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벌어질 거다. 나는 방금 각성한 힘을 다시 떠올렸다. 혼식. 놈의 능력을 흡수하고, 스킬 정보를 읽을 수 있는 힘. 이걸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챔피언의 방어를 뚫을 뭔가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민석 씨! 챔피언 쪽으로 갈게요!" 내가 외쳤다. "위험해요!" 그가 소리쳤지만, 나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튀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일반 고블린 하나가 나를 막았다. 칼을 부딪쳤다. 카앙. 손목이 다시 저릿하다. 그런데 이번엔 아까보다 견딜 만했다. 방금 흡수한 힘이 아직 남아 있는 건가. 두 번째 부딪침에서 놈의 균형이 무너졌다. 서걱. 놈이 쓰러진다. [유니크 스킬 '혼식' — 재발동] [대상의 능력치 10%를 흡수합니다.] 또 흡수됐다. 몸이 더 가벼워진다. 동시에 뭔가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마치 이 힘이, 내가 상대를 죽일 때마다 뭔가를 더 원하는 것 같은 느낌. 잠깐이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계속 써도 괜찮은 걸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챔피언이 코앞에 있었다. 놈의 몸에서 풍기는 압박감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까이서 보니 뿔 하나의 크기가 내 팔뚝만 했다. 놈이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뿔이 붉게 빛난다. "도현 씨, 조심해요!" 김하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놈의 손에서 뭔가 뻗어나왔다. 붉은 기운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피할 자리가 없다는 걸 이미 안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서걱— 옷깃이 갈렸다. 가슴을 스친 상처가 화끈거린다. 피가 흐른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짧았다. "이거, 원거리 공격도 되는 거였어?" 내가 중얼거렸다. 일반 고블린엔 없던 능력이다. 확실히 이건 챔피언, 다른 등급의 개체다. 등급이 다르면 이렇게 판이 달라지는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놈이 다시 손을 들었다. 두 번째 채찍이 준비되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놈의 손목을 감싸며 점점 짙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순간, 놈의 눈을 똑바로 봤다. 뭔가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놈의 팔 안쪽에서 뭔가 다른 색의 무늬가 스쳤다. 검은 바탕 위에 옅은 회색으로 그어진 선. 다른 부위의 갑각과는 결이 달랐다. 약점 같은 게 있는 건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 말고 붙잡을 게 없었다. 망설이면 다음 채찍이 날아온다. 두 번째 채찍이 날아왔다. 나는 몸을 낮춰 피하며, 놈의 팔 안쪽을 향해 칼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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