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킨 영혼의 무게

1화

졸업장을 받은 게 어제였다. 오늘은 헌터 길드 서울 본부, 3층 배정실 앞이다. 번호표를 뽑아 쥔 손에 땀이 찬다. 대기줄이 길다. 다들 나처럼 어색한 얼굴로 서 있다. 누구는 부모님과 같이 왔고, 누구는 혼자다. 나는 혼자다. 엄마는 오늘 새벽에 출근했다. 헌터 길드 배정 같은 건 이제 일상이 됐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일상이 되긴 개뿔. 나한테는 오늘이 인생 최대 사건인데. 번호가 불릴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튄다. 칠십이 번, 칠십삼 번, 칠십사 번. 내 번호는 칠십오 번이다. "이도현 씨, 맞으시죠." 창구 직원이 내 이름을 확인한다. "네." "각성 등급 D, 스킬 미판별. 신입 표준 배정으로 진행됩니다." 표준 배정이 뭔지도 모르는데 서류에는 이미 도장이 찍혀 있다. "저 선택할 수 있는 건가요?" "신입은 배정제입니다. 첫 3회는 강제 편성이에요." 직원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는다. 나는 웃지 못했다. 서류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뭐라고 쓰여 있는데, 직원이 서류를 바로 가져가버려서 읽을 새도 없었다. 뭐였을까. 나중에 물어봐야 하나. 각성한 지 이제 반년. 고3 여름, 체력측정 중에 마력 반응이 터졌다. 그날 나는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보건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담임이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마력 반응 떴어."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놨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한헌터길드는 10년 전, 던전이 세계 각지에 동시 출현한 그날부터 세워졌다. 서울에도 벌써 열두 개의 등록 던전이 있고, 매달 새로 뜨는 균열까지 합치면 관리가 안 될 지경이라 했다. 그래서 신입은 무조건 던전에 넣는다. 실전으로 배우라는 거다. 죽지 않으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조금씩 실감하는 중이다. 서류를 내려다본다. [배정 던전: 관악 4구역 균열 / 등급: E / 목표: 고블린 개체 소탕] E급이면 안전한 편이라고 다들 말했다. 말했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직접 겪은 게 아니니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도 다 그런 식이었다. "E급은 껌이다", "고블린은 초보 상대로 딱이다". 근데 그 글 쓴 사람들, 지금 다 잘 살아있나? "장비는 여기서 받으세요." 직원이 가리킨 창구에서 방어구와 단검 한 자루를 받았다. 무상 지급이라지만 만듦새가 헐거웠다. 신입용이라는 표식이 손잡이에 새겨져 있다. 이걸로 고블린을 잡으라고. 칼날을 눌러보니 손끝이 저릿하다. 예리하지 않다. 방어구는 가슴팍에 얇은 철판 하나 덧댄 게 전부다. 이게 진짜 방어구인가. 차라리 학교 체육복이 더 든든할 것 같은데. "이거 진짜 쓸 만한 거 맞아요?" 혼잣말이었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신입은 다 그런 거 받아요. 저도 그랬는데." 돌아보니 낯선 남자가 서 있다. 삼십 대쯤, 완장에 헌터 등급 C가 박혀 있다. "강민석입니다. 이번 조 인솔 맡았어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이 크고 단단했다. 굳은살이 켜켜이 박혀 있다. 이 사람은 진짜구나. 나는 아직 아니고. 손을 잡는 순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인솔하는 건 아니구나. "긴장 많이 되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솔직해서 좋네요." 그가 웃는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편치 않다. 웃는데 눈은 안 웃는다. 저런 얼굴, 어디서 봤더라. 아, 병원에서 나쁜 소식 전할 때 의사들이 짓는 표정이랑 비슷하다. "E급이라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균열은 등록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게 왜요?" "패턴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뜻이니까요." 짧은 말이었는데 뭔가 걸린다. 패턴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건, 뭐가 나올지 정확히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고블린 다섯 마리 소탕이 목표라고 들었는데요." "보고서 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보고서 상으로는요?" 그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대답 안 하는 게 대답이라는 걸, 이때는 몰랐다. "질문 있으면 지금 하세요. 던전 들어가면 그럴 시간 없어요." 질문이야 백 개는 되는데, 뭘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을 확률이 얼마나 돼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나서야 아, 이건 진짜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이었나 싶었다. 강민석이 잠깐 나를 쳐다봤다. "낮아요. 제가 있으니까."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근데 그 낮다는 게 얼마나 낮은 건지는 안 알려준다. 배정실 옆 대기실로 이동했다. 의자 네 개에 사람이 셋 앉아 있었다. 다들 나처럼 신입 표식이 붙은 장비를 걸치고 있다. 다섯 명이 한 조라고 했으니 하나가 더 온다는 뜻이다. 대기실 공기가 무겁다. 다들 서로 눈치만 보고 말을 안 한다. 누구 하나가 입 열면 그 긴장이 확 터질 것 같아서, 아무도 먼저 입을 안 여는 분위기다. 창밖으로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어제까지는 교복을 입고 저 거리를 걸었다. 오늘은 헌터복을 입고 던전에 들어간다. 하루 사이에 세상이 바뀐 것 같은데, 실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바뀐 거겠지.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열여덟 살,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은 얼굴. 이 얼굴로 고블린을 상대해야 한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웃음이 안 나왔다. 대신 속이 뒤틀렸다. 아침에 먹은 게 다 넘어올 것 같다. "저기, 이도현 씨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나를 부른다. "네, 맞는데요." "저도 오늘 배정받았어요. 박서연이에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다. 나만 긴장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조금 안심됐다. 동시에 조금 더 불안해졌다. 다섯이 다 이 정도면, 이 조는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긴장돼요?" 내가 물었다. "안 긴장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서연이 웃으면서 답했다. 근데 그 웃음도 나만큼 어색했다. "각성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세 달이요. 도현 씨는요?" "반년이요." "오, 선배시네요." 선배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반년 먼저 각성한 게 무슨 선배야. 그래도 그 말에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애 하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도 껴도 돼요? 계속 혼자 앉아 있으려니 심심해서." "당연하죠." 서연이 자리를 옆으로 옮겨줬다. 남자애는 스무 살쯤 되어 보였는데, 손톱을 계속 물어뜯고 있었다. 불안한 건 다 똑같구나. 강민석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태블릿을 든 채, 표정이 아까와는 조금 다르다. 아까까지 여유롭게 웃던 얼굴이 지금은 좀 굳어 있다. 저 표정 변화, 좋은 신호는 아닐 것 같은데. "출발 전에 브리핑 좀 하겠습니다." 그가 화면을 켠다. 지도 위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인다. 관악 4구역 균열. "열 시간 전에 재탐사가 있었는데요."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 잠깐의 침묵이 대기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개체 수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다섯이라던 목표가 몇으로 바뀌는지, 그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서연이 내 옆에서 숨을 짧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쥔 단검이 갑자기 더 가벼워진 것 같다. 아니, 이건 무기가 가벼워진 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더 불안해졌다는 뜻이겠지.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