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던전으로 먹고산다

3화

각성 적성 검사 접수가 시작됐다는 소식은 학교 게시판에도 붙었다. A4 용지 한 장. 굵은 글씨로 박힌 제목 아래 작은 글씨들이 빽빽했다. 정선재는 그 종이를 뜯어 가방에 넣었다. 옆에서 다른 애들도 우르르 몰려와 종이를 뜯었다. 이거 하면 뭐 좋은 거 있냐. 몰라, 그냥 하라니까 하는 거지. 애들의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정선재는 그 말들을 흘려들었다. 이게 뭔지 아는 놈은 이 학교에 자기 한 명뿐일 거였다. 각성이라는 단어가 세상을 뒤집어놓을 거라는 걸, 열다섯 살짜리들이 알 리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밥상 앞에 앉았다. 된장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가 반찬을 놓으며 물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종이 받았니. 각성 검사 신청서. 정선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머니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거 꼭 해야 되는 거야? 의무는 아닌데, 하는 게 나아요. 왜. 앞으로 세상이 그쪽으로 돌아갈 거니까요. 어머니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너 요즘 이상한 말 자주 한다. 정선재는 밥을 한 숟갈 떴다. 뭐가 이상해요. 엄마가 파트타임 하는 마트도 곧 없어질 거예요. 그 자리에 던전 용품점 들어올 거니까. 뭐?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느낌이 그래요. 정선재는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은 알았다. 학교 게시판 옆에 붙은 상가 임대 공고, 그 건너편 부동산 유리창에 붙은 매매 시세표. 서른 해를 산 눈으로 보면 다 보이는 정보였다. 마트 자리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짚어내는 데는 미래 지식까지 필요 없었다. 그냥 어른의 눈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걸 열다섯 살짜리가 말하니 문제였다. 어머니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선재야. 네. 너 요즘 다른 사람 같아. 정선재는 그 말에 젓가락질을 멈췄다. 다른 사람 같다는 말. 정확한 표현이었다. 너무 정확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엄마가 걱정돼서 그래.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선재는 잠깐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서른 살에 FX로 전재산을 날리고 잠들었다가 열다섯 살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누가 믿어줄까. 정신병원행이지, 그건. 정선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정선재는 그냥 웃었다. 그냥 좀 똑똑해진 것뿐이에요.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정선재를 바라봤다.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정선재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증명해야 할 순간이 올 거였다. 그때가 되면 말이 아니라 결과로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방에 들어와 신청서를 펼쳤다. 각성 적성 검사 신청서. 이름, 학교, 학년을 적는 칸이 있었다. 검사 장소는 지역 게이트 관리센터였다. 정선재는 그 아래 작은 글씨를 읽었다. 조기 각성 적성자 우선 선발 – 상위 3% 즉시 임시 각성 부여. 임시 각성. 정선재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그냥 검사가 아니었다. 잘하면 그 자리에서 각성자가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남들은 성인이 돼서야 겨우 잡는 기회를, 학생 신분에 먼저 낚아챈다는 뜻이었다. 앞선다는 것. 그게 이번 생에서 정선재가 쥔 유일한 패였다. 전생의 지식은 있어도 돈은 없다. 돈은 있어도 시간이 없다. 이번엔 둘 다 확보할 셈이었다. 신청서 빈 칸에 이름을 눌러 적었다. 글씨체가 여전히 서른 살 때 습관대로 삐뚤빼뚤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검사가 진행됐다. 강당에 큰 기계가 설치됐다. 사람 키만 한 원통형 장치였다. 위잉거리는 소리가 났다. 낯선 기계 냄새, 금속과 전류가 섞인 냄새가 강당 전체에 퍼졌다. 애들이 한 명씩 그 안에 들어갔다. 몇몇은 들어가기 전부터 손을 떨었다. 몇몇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측정 끝난 애들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씩 웃는 애도 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뜬 애도 있었다. 숫자가 사람을 갈라놓는 순간이었다. 정선재의 차례가 왔다. 장치 안으로 들어가자 손목에 무언가 채워졌다. 측정 밴드였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았다. 삐── [적성 지수 측정 중...] 화면에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10, 30, 50, 70. 숫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치솟았다. [측정 완료] [적성 지수: 97.8 – 상위 0.3%] 검사관의 눈이 커졌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다시 측정해볼게요. 검사관이 밴드를 조정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삐── [적성 지수: 98.1 – 상위 0.2%] 검사관이 정선재를 새삼스레 쳐다봤다. 학생, 이거 진짜 대단한 수치예요. 정선재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돌았다. 서른 해를 산 사람의 뇌 구조가 열다섯 살 몸에 들어앉아 있으니, 뭐라도 남들과 다르긴 하겠지. 각성 적성이라는 게 정확히 뭘 재는 건지는 몰라도. 경험과 판단력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는 모양이었다. 주위에 있던 다른 애들이 수군거렸다. 야, 저 새끼 뭐야. 쟤 원래 저런 애였어? 정선재는 그 시선들을 대충 무시했다. 관심 없었다. 숫자만 맞으면 됐다. 검사관이 서류를 뒤적였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 수치면 조기 임시 각성 대상이에요. 다음 주에 별도로 게이트 관리센터로 오셔야 합니다. 다음 주. 정선재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남들보다 먼저 던전에 들어갈 기회였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잡는, 확실한 우위. 그런데 검사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서류 한 장을 더 넘기더니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정선재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어요? 검사관이 종이를 다시 들여다봤다. 정선재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져 있었다. 학생, 혹시 최근에 몸에 이상 느낀 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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