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모니터 화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선재는 그 숫자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마진콜. 강제청산. 잔고 0원. 서른 해를 살아온 흔적이 화면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전세금까지 끌어다 넣은 계좌였다. 레버리지 백 배짜리 도박이었다.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
새로고침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야, 이게 말이 되냐.
혼자 중얼거렸다.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룸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편의점 소주 두 병을 깠다. 안주는 없었다. 그냥 마셨다. 목이 타는 느낌도 없었다. 감각이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빈 병이 바닥에 굴렀다.
달그락.
정선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서른. 이룬 것도 없고 남은 것도 없었다. 부모도, 여자도, 친구도. 계좌 속 숫자 하나에 인생을 걸었던 게 우스웠다.
눈이 감겼다.
삐빅. 삐빅.
귀에 익은 알람 소리였다. 아니, 익지 않은 소리였다. 스마트폰 알람이 아니었다. 오래된 탁상시계, 그 조악한 전자음.
정선재는 눈을 떴다.
천장이 낮았다. 벽지가 낡았다. 만화 캐릭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그 만화였다.
뭐야 이거.
몸을 일으켰다. 손이 작았다. 팔뚝에 근육이 없었다. 배에 살도 없었다. 삼십 대 몸이 아니었다.
거울을 찾았다. 책상 위 작은 손거울에 얼굴을 비췄다.
중학생.
그것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십오 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미쳤네.
손이 떨렸다. 방 안을 둘러봤다. 책상 위 다이어리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9년. 3월.
정선재는 그 자리에서 몇 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죽은 게 아니라 돌아온 건가.
죽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른두 살이 열다섯 살로 바뀌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데.
그런데 이 손, 이 얼굴, 이 방.
전부 진짜였다.
이거 완전 개꿀 아니야?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2009년이면 아직 코인이란 말도 없던 시절이었다. 부동산도 지금 가격의 십분의 일이었다. 삼성전자 주가도 지금과 자릿수가 달랐다.
머릿속으로 숫자를 굴려봤다.
지금부터 모아서, 지금부터 넣어서.
십오 년이면.
이번엔 진짜 다르게 산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덜컹.
선재야, 학교 늦었어!
어머니였다. 파마머리, 앞치마, 부은 눈. 파트타임 새벽 일을 하고 온 얼굴 같았다.
정선재는 순간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봤다.
오래 못 본 얼굴이었다. 전생에서, 아니 이전 삶에서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 냄새, 그 좁은 병실.
기억이 나려다 말았다.
엄마.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그래, 밥 안 먹었다고 그런 얼굴이야? 빨리 씻어.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정선재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표정을 지웠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지.
일단 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
세수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다시 봤다. 여드름 자국 하나 없는 뽀얀 피부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얼굴로 십오 년을 또 살아야 한다니.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낯익은 골목이었다. 슈퍼, 문방구, 오락실 자리에 지금은 없는 만화방까지 있었다.
간판 글씨체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정선재는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낡은 전봇대, 담벼락에 붙은 광고지, 지나가는 봉고차 한 대. 전부 십오 년 전 그대로였다.
골목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도훈.
같은 반 반장이었다. 아니, 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애들 삥을 뜯던 놈이었다. 정선재는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도훈은 이 시기에 정선재에게서 매달 오천 원씩 뜯어갔다. 삼 년 내내였다.
그때는 그냥 당했다.
지금은 아니다.
야, 정선재.
도훈이 앞을 막아섰다. 키가 정선재보다 한 뼘은 컸다. 어깨도 넓었다.
오늘도 늦었네.
뭐가.
돈 있냐고.
도훈이 손을 내밀었다. 어깨를 툭툭 치는 손짓이 낯익었다.
정선재는 그 손을 물끄러미 봤다.
이 새끼, 이 손짓 하나로 삼 년을 뜯어갔지.
그리고 웃었다.
없는데.
뭐?
없다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야 이 새끼가.
도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도훈이 손목을 잡으려 했다. 정선재는 그 손목을 반대로 낚아챘다. 서른 해를 살아본 몸이 아니었지만, 서른 해를 살아본 판단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대의 무게중심, 힘의 방향, 그 모든 게 눈에 보였다.
뚝.
손목이 꺾이는 소리 같은 게 났다. 실제로 부러진 건 아니었다. 그냥 자세가 무너진 소리였다. 도훈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쿵.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뭐, 뭐야.
도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변 애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다음에도 이러면.
정선재가 몸을 숙여 도훈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거든.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이전 삶에서 도훈은 고등학교 때 사고를 쳐서 소년원에 갔다. 그다음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근거 없는 협박이 아니었다.
도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정선재는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도훈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십오 년 묵은 빚, 이걸로 청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채로 걸었다.
몸이 가벼웠다. 걸음마다 뭔가 통쾌한 느낌이 붙었다.
이 맛에 다시 사는 건가.
교실에 들어섰다. 낡은 칠판, 촌스러운 급훈, 그리운 나무 책상. 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 붙은 시간표, 청소 당번표, 학급 규칙까지도 눈에 익었다.
정선재는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상 서랍을 뒤져봤다. 낙서장, 만화책 한 권, 다 쓴 볼펜 몇 개.
이 시절의 자기가 뭘 하고 살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다 문득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던전 안전 수칙 – 게이트 발견 시 즉시 112 신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삽화 속에는 초록빛 짐승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주의사항이 나열돼 있었다.
뭐야 저건.
정선재는 눈을 찌푸렸다.
2009년에 이런 게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없었다. 이런 포스터는 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도 없고, 게이트도 없고.
이 시절에는 그런 단어 자체가 없었다.
앞자리 애가 뒤를 돌아봤다.
야, 어제 뉴스 봤냐. 부산 던전에서 또 사고 났다더라.
정선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굳었다.
부산 던전이라니.
그런 게 있었어?
당연한 듯 던지는 그 말투가 더 이상했다. 마치 원래부터 있던 일처럼, 흔한 뉴스처럼.
정선재의 머릿속에서 뭔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억 속 2009년과, 지금 눈앞의 2009년이.
같은 해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