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계자님, 여긴 게임인가요?

5화

골목은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서은하라는 이름을 아직 모른 채로, 나는 그저 검은 코트의 뒷모습만 보고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이 고르지 않았다. 어떤 데는 아스팔트였고, 어떤 데는 흙바닥이었고, 어떤 데는 깨진 보도블록이었다. 그 모든 게 뒤섞여서 다리에 전해지는 감각이 계속 바뀌었다. 좁은 통로, 벽돌 틈, 낮은 담장을 넘는 그녀의 몸놀림이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 골목을 수백 번 지나본 사람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발이 먼저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그녀의 코트 자락만 보고 따라붙었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생각을 하려는 순간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았으니까. "이쪽." 그녀가 손짓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저렇게 평온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낮은 철제 문이 하나 보였다. 페인트가 다 벗겨져서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녹이 슨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끼이익.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누가 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서은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미 몇 번이나 열어본 문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계단이 지하로 이어졌다. 어둠이 짙어졌다. 발밑이 미끄러웠다. 계단 하나하나가 축축했다. 아마 오랫동안 비가 새거나, 아니면 지하수가 스며드는 곳인 것 같았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뒤에서 총성이 한 번 더 울렸다. 타앙! 소리가 아까보다 멀어져 있었다. 그 사실이 잠깐 안심이 되다가, 곧바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멀어졌다는 건, 저들이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뜻일까.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서 우릴 포위하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웠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에 쥔 권총이 계속 흔들렸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있었는데도 흔들림이 멈추지 않았다.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놓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안전장치처럼 느껴졌다. 이걸 놓는 순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계단 끝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낡은 창고 같았다. 먼지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어딘가 곰팡이 슨 종이박스 냄새도 났다. 한쪽 벽에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그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 불빛이 창고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선반 몇 개, 낡은 상자들, 먼지 쌓인 유리병 몇 개. 누군가 오래전에 버려두고 간 물건들. 서은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숨을 몰아쉬는 나와, 아무렇지 않은 그녀. 대조가 너무 뚜렷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방금까지 담장을 넘고 골목을 가로지르며 뛰어온 사람 같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긴, 안전한가요." 목소리가 떨려서 스스로도 이상하게 들렸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갈라진 적이 있었나. "당분간은."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당분간이라니, 그럼 이 뒤에는 뭐가 있다는 건데. 숨을 고르려 애썼다. 어깨가 계속 들썩였다. 손에 쥔 권총을 내려다봤다. 검붉은 얼룩이 손잡이 근처에 묻어 있었다. 정민혁의 것인지, 내 손에서 난 상처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손등을 살짝 문질러봤다. 쓰라린 감각이 뒤늦게 올라왔다. 어디서 긁힌 건지도 모르는 상처였다. "당신, 누구예요." 이번엔 목소리에 힘을 줬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서은하는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이 이상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그런 눈빛. 불편했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오래 지켜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 "어제부터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죠." 그녀의 말이 심장을 관통했다. "방이 다르게 보이고, 골목이, 사람들이." 숨이 막혔다. 어떻게 아는 거지. 어제 그 방에서 벽이 무너지듯 보였던 것도, 사람들의 형체가 이상하게 뒤틀려 보였던 것도, 나 혼자만 아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당신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나요." "생각보다 오래." 대답은 짧았고, 더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차라리 구체적인 숫자라도 말해줬으면. 일주일, 한 달, 뭐든.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라니, 그게 대체 얼마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등이 낡은 선반에 부딪혔다. 덜그럭,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보니 낡은 유리병 하나가 굴러가고 있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말라붙은 액체 자국만 병 안쪽에 남아 있었다. "나를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바닥이 미끄러운데도,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당신이 방금 사람을 쐈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걔들이 먼저." 말이 빨라졌다.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변명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서은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표정이 더 압박감을 줬다. 동요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다는 게,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판단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 반짝였다. 그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1초, 2초, 아니 실제로는 그보다 짧았을 텐데. 숨 한 번 쉴 시간도 안 됐는데 영원처럼 늘어졌다. "확인." 한 단어였다. 그 단어가 공기를 얼렸다. "확인이라니, 뭘." "당신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걸."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뜬다니, 나는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 잠들지도 않았고, 눈을 감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건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눈을 뜬다는 게, 물리적인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 같은 느낌. 설명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계단 위쪽에서. 다각. 서은하의 시선이 순간 위쪽을 향했다. 표정에 처음으로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아주 짧게,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가 다시 풀렸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짧은 변화가 나한테는 경보음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없어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뭐, 뭐 하는." 손끝이 내 손목에 닿았다. 차가웠다. 마치 얼음을 만진 것처럼.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냉기가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 순간, 감각이 다시 폭발했다. 이번엔 방향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공간의 구조가 보였는데, 지금은 그녀의 몸에서 뭔가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손끝을 통해서 전류가 아니라 어떤 기억, 어떤 이미지가 직접 흘러드는 것 같은. 짧은 장면들이 눈앞을 스쳤다. 낯선 방, 형광등이 깜빡이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씨앗 같은 것의 박동 소리, 두근, 두근. 어떤 여자아이의 뒷모습. 머리카락이 길었고, 교복 같은 걸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장면들은 나타났다가 모래처럼 흩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촉이 아니었는데도, 꼭 그렇게 느껴졌다. "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방금 본 게 뭔지, 왜 봤는지, 어떻게 봤는지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됐다. 서은하는 손을 떼며 말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 말이 더 답답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 상황에서 뭘 더 미룰 수 있다는 건지. 따지고 싶었는데, 계단 위쪽에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통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박태식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밑에 뭐가 있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정민혁, 박태식, 그 이름들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서은하가 나를 창고 안쪽 구석으로 밀었다. 손힘이 생각보다 셌다. 가벼운 체구인데, 밀리는 순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손에 쥔 권총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쳐야 하나 싶었는데, 손이 떨려서 걸치는 것조차 겁이 났다. 계단 위쪽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서은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계단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에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마치 저 위에서 내려올 게 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겪어본 것처럼. 발소리가 계단을 하나씩 밟았다. 다각. 다각. 숨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발소리가 한 계단씩 내려올 때마다 심장이 그만큼씩 뛰어올랐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조력자인지, 아니면 나를 이용하려는 다른 무엇인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방금 손끝으로 흘러들어온 장면들, 형광등, 씨앗의 박동, 여자아이의 뒷모습. 그게 그녀의 기억인지, 내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 제삼의 무언가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확실한 한 가지는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녀 없이는 이 골목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 계단 위 발소리가 마지막 층에 닿았다. 서은하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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