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부평역 인근에서 야간 알바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낮부터 그쪽에 볼일이 있었다.
중고로 산 헤드셋 마이크가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들러야 했다.
싸구려라도 삼만 원짜리를 두 달 만에 고장 낸 내 손모가지를 원망하며,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 감각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그냥 사람들이었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은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좌표도, 숫자도, 선도 없었다.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그 술집 골목에서 벌어진 일은, 그냥 과로와 스트레스가 만든 헛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부평역에 내렸을 때도 그 믿음은 아직 살아 있었다.
***
역 출구를 나서자 사람들 소리가 밀려왔다.
오토바이 배기음, 붕―.
행상 아주머니의 확성기 소리, 지지직 웅웅.
평범한 낮의 소음이었다.
나는 그 소음이 반가웠다.
정상적인 세계가 아직 여기 있구나, 하는 안도감.
그런데 첫 걸음을 떼는 순간, 다시 왔다.
골목 입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공간이 '읽히기' 시작했다.
왼쪽 담벼락은 어깨높이라 뛰어넘기 가능, 오른쪽 전봇대 뒤는 사각지대, 정면 세 갈래 길 중 하나는 막다른 골목.
숫자와 선이 다시 눈앞을 덮었다.
이번엔 헛것이라고 우길 수가 없었다.
너무 선명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게임 UI 폰트처럼, 반투명한 초록빛으로 떠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걸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걸으면서도 계속됐다.
"뭐지, 이거 진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지나가던 사람이 힐끗 쳐다봤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걸음을 서둘렀다.
속으로는 미친놈처럼 뛰고 싶었지만, 여기서 뛰면 그야말로 사람들 눈에 미친놈으로 확정될 것 같았다.
헤드셋 문제를 서비스센터에 맡기고 나오는데, 상가 골목을 지나면서 이상함이 더 확실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마치 게임 속 NPC처럼, 이동 경로가 예측되는 느낌이었다.
저 아저씨는 삼 미터 앞에서 왼쪽으로 꺾을 것이다.
저 커플은 곧 멈춰 서서 스마트폰을 볼 것이다.
저 교복 입은 애는 편의점 앞에서 멈춰 담배 냄새를 피하려 코를 막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한 번, 두 번이면 우연이라 치겠다.
그런데 열 번, 스무 번을 연속으로 맞추고 있으니, 우연이라는 단어가 스스로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순한 예측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사람의 걸음걸이, 시선의 방향, 가방을 쥔 손의 위치까지, 그 모든 게 하나의 알고리즘처럼 계산되어 나왔다.
마치 내 눈이 게임 엔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NPC들의 이동 루틴을 미리 읽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눈.
나는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과로다. 그냥 과로야."
스스로에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야간 알바에 게임까지 하니 뇌가 이상해진 거다.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선생님, 제가 사람들이 게임 캐릭터처럼 보여요, 라고 하면 바로 정신병동으로 끌려갈 것 같았다.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그 이세계 전생물처럼, 의사가 나를 보고 "오, 당신도인가요" 하면서 비밀 조직으로 안내해 줄지도.
그런 헛된 상상까지 하면서, 나는 애써 웃어보려 했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
골목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둔탁한 소리, 퍽.
그리고 낮은 신음.
감각이 곧바로 반응했다.
소리가 난 방향의 골목이 눈앞에 지도처럼 펼쳐졌다.
좁은 통로, 세 명의 인영, 그중 한 명은 벽에 밀쳐져 있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시비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은 뉴스에서만 봐도 충분하다.
정의로운 시민 코스프레는 영화에서나 하는 거지, 현실에서 하면 그날로 병원 신세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 골목의 구조가 계속 눈앞에 남아 있었다.
마치 게임의 미니맵처럼, 인물들의 위치가 붉은 점으로 표시되는 것 같은 착각.
하나, 둘, 셋.
세 개의 점.
그중 두 개가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괜히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줄이려고, 신발 밑창이 아스팔트에 닿는 순간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거, 조용히 좀 하시라고요."
낮고 거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걸었다.
그런데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다리가 굳는 느낌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저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건 정의감이 아니었다.
그냥 순수한, 이 감각이 계속 반응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충동이었다.
내 눈이 왜 저 골목의 구조를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는지.
왜 저 점 세 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지.
나는 결국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봤다.
***
골목 안쪽, 한 남자가 벽에 밀쳐진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얼굴이 이미 부어 있었다.
넥타이는 반쯤 풀려 목에 걸려 있었고, 셔츠 앞섶에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명은 검은 재킷에 캡모자를 눌러쓴, 체격이 좋은 남자.
다른 한 명은 가늘쭉한 몸매의, 눈빛이 날카로운 남자.
둘 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한쪽은 주머니에, 한쪽은 허리춤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감각이 다시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두 남자의 주머니와 허리춤에서 미세한 형체가 도드라져 보였다.
금속의 윤곽.
권총이었다.
순간 다리가 얼어붙었다.
숨이 얕아졌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오는 게 느껴졌다.
도망쳐야 한다.
지금 당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세 갈래 길 중 어느 쪽이 가장 빠르게 큰길로 이어지는지 계산이 끝나 있었다.
왼쪽 골목, 12미터.
오른쪽 담벼락 너머, 8미터.
정면은 안 된다. 막다른 길이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골목이, 이 상황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접착된 것처럼, 아무리 힘을 줘도 떨어지지 않았다.
캡모자를 쓴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좁은 골목 안, 형광등도 없는 그 어둑한 공간에서, 그의 눈빛만이 유독 선명하게 각인됐다.
"거기, 넌 뭐야."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올랐다.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헤드샷을 노려도, 죽으면 리스폰이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 죽으면, 그냥 죽는 거다.
부활 버튼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좌표들이, 골목의 구조가, 도망칠 수 있는 세 갈래 길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이 감각이, 정작 위기 앞에서는 도망칠 준비를 다 해놓고도, 몸만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캡모자 남자의 손이 허리춤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알았다.
이 좌표를 아는 것과, 살아서 그걸 실행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