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지직.
두 번, 세 번, 그러다 다시 안정을 찾았다.
남동공단 물류센터의 야간 조명은 늘 이런 식이었다. 새 걸로 갈아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소장님은 "다음 주에"라는 말만 반복했고, 그 다음 주는 늘 다음 주가 되어 있었다. 박스를 쌓다 말고 고개를 들면 저 형광등이 나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망상이다.
피곤하면 다 그렇게 느껴진다. 대학 때 밤새 과제하다가 벽지 무늬가 사람 얼굴로 보였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거랑 똑같은 거다, 라고 생각하며 박스를 다시 들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웅웅거리며 돌아갔다. 그 소리에 맞춰 발을 움직이고, 허리를 굽히고, 팔을 뻗었다. 몇 시간째 반복하다 보면 몸이 로봇처럼 움직였다.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데 손은 알아서 박스를 쌓는다. 신기한 일이었다. 신기하다기보다는 서글픈 일이었다.
새벽 여섯 시, 교대자가 왔고 나는 퇴근 카드를 찍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늘 하는 인사였다.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본 채 스쳐 지나가는, 그런 인사.
인천에서 구로까지 첫 지하철을 탔다. 새벽 첫차는 이상하게 사람이 많았다. 나 같은 야간 근무자들, 혹은 새벽 배송 기사들, 혹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람들. 다들 좌석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좌석에 앉자마자 눈이 감겼다가, 내릴 역을 지나칠까 봐 다시 떠졌다가, 그 짓을 세 번 반복했다. 네 번째쯤에는 아예 휴대폰 지도 앱을 켜서 위치를 확인하며 버텼다. 이러다 진짜 과로사하는 거 아닌가,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웃긴데 웃을 힘도 없었다.
원룸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몸이 반쯤 죽어 있었다. 신발을 벗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현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가, 그러면 진짜 잠들 것 같아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습관이다. 중독이라고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하루 열 시간씩 박스를 나르고 와서 또 스크린 앞에 앉는 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헤드셋을 쓰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헤드셋을 쓰고 게임을 켰다. 로딩 화면이 뜨는 동안 냉장고에서 물을 한 컵 따라 왔다. 화면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피곤함도, 물류센터 박스 냄새도, 사라진다. 이게 내가 이 짓을 계속하는 이유다. 현실에서는 박스나 나르는 알바생이지만, 여기서는 적어도 조준선을 정확히 맞출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총소리, 발소리, 리로드하는 소리.
타각.
적이 왼쪽 복도에서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조준선을 옮기고 쐈다.
헤드샷.
화면에 킬 로그가 떴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집중했던 한 판이었다. 이런 순간에는 정말로, 잠깐이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물류센터도, 통장 잔고도, 아무것도. 그냥 화면과 나만 있다.
한 판이 끝나고 다음 판을 돌릴까 하다가 시계를 봤다. 벌써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이러다 또 밤낮이 완전히 뒤바뀌겠구나 싶어서, 아쉬운 마음으로 게임을 끄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방이 보였다. 정확히는, 방이 '읽힌다'.
침대는 벽에서 이 미터, 문은 왼쪽 대각선 삼 미터, 창문은 사각지대 없이 정면. 숫자로 딱딱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게임 속 미니맵을 보는 것처럼, 방의 구조가 선과 좌표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눈을 떴다.
방은 그냥 방이었다. 좁고, 곰팡이 냄새가 살짝 나고, 빨래 건조대가 삐딱하게 서 있는. 옷걸이에는 어제 입었던 작업복이 그대로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다 먹은 컵라면 용기가 쌓여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지극히 지저분한 원룸이었다.
그런데 눈을 다시 감으면 그 좌표들이 돌아왔다.
"뭐야 이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밤을 새워서 그런 거다. 지친 뇌가 게임 화면을 방에 덧씌우는 것뿐이다. 요즘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게임을 너무 오래 하면 현실에서도 게임처럼 사물이 보인다는, 일종의 잔상 효과 같은 거. 유튜브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내가 지어낸 기억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정리하고 이불을 덮었다.
그런데 눕고서도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천장의 구조, 벽지의 이음새, 문틀의 각도. 하나하나가 마치 레벨 디자이너가 배치해놓은 것처럼 '의미'를 가지고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엄폐 가능, 저기는 노출 구간, 저 창문은 진입로.
숨이 조금 빨라졌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무섭다기보다는, 낯설었다. 마치 내 방이 처음 보는 공간처럼 다시 짜맞춰지는 기분.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봤다. 감각은 그대로였다. 발끝을 움직여 봤다. 여전했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그 경계가 흐릿해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나는 눈을 뜨고 억지로 창밖을 봤다. 구로의 새벽 골목, 편의점 간판,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안심이 됐다.
다시 눈을 감았다.
감각이 또 왔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에 반투명한 선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옷장 모서리, 책상 다리, 콘센트 위치까지. 마치 누군가 이 방을 스캔해서 데이터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심지어 그 선들 위로 작은 숫자가 떠 있는 것도 같았다. 거리, 각도, 뭐 그런 것들. 총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인생인데 이런 게 왜 보이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웃음이 나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야간 알바에 게임 폐인, 결국 정신까지 나가는구나. 어디 병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은 얕았다. 꿈속에서도 좌표가 보였다. 어딘가 낯선 복도, 좁고 어두운, 벽에는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이 있는.
문이 열리는 소리, 다각.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실루엣, 어깨가 넓은. 걸음마다 바닥이 살짝 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한데, 몸이 그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 실루엣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잠에서 깼다.
오후 두 시였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볕이 방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짜증부터 났을 텐데, 오늘은 그냥 멍하니 그 빛을 바라봤다. 먼지가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는 게 보였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적어도 이 방은, 이 순간에는, 게임이 아니라 그냥 방이었다.
일어나서 물을 마셨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유통기한이 애매한 우유가 보였다. 마실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뒀다. 배탈까지 나면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대신 시리얼을 그릇에 붓고 물을 부었다. 맛은 없었지만 배는 채워졌다.
밥을 먹으면서 방을 둘러봤다. 눈을 뜨고 있을 땐 그 이상한 감각이 안 온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젯밤 일은 그냥 과로 때문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게임을 너무 많이 했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씻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다시 그 감각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짧게.
화장실 문 위치, 세면대 배수구, 샤워커튼 봉의 강도까지. 마치 이 방의 취약점을 전부 파악하는 것처럼. 저 봉은 체중을 못 견디고 부러질 거고, 저 문은 안쪽에서 잠그면 삼 초는 버틸 거고, 그런 계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손이 살짝 떨렸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오늘 밤 다시 출근이다. 인천까지 가려면 씻고 밥 먹고 나가야 한다. 일상은 계속된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거울을 봤다. 눈 밑이 시커멨다. 며칠은 못 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이 얼굴로 또 열 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는 게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가야 한다. 월세는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
가방을 챙기다가 어제 벗어둔 작업복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와 박스 종이 냄새가 섞인, 익숙한 그 냄새. 이게 내 현실이지, 하고 다시 한번 스스로를 붙잡았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방을 한 번 돌아봤다. 좁은 원룸, 익숙한 냄새, 삐딱한 건조대. 평범한 내 방이었다.
그런데 문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진동이 느껴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이 공간을 함께 보고 있는 것 같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런데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서늘함은 가시지 않았다. 등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 그런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을 게 뻔한, 그런 기분이었다. 골목을 걸으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매번 아무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사람들 틈에 섞이니 안심이 됐다.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저녁, 평범한 출근길. 나도 그중 하나였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다시 눈을 감아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지금 그 좌표들이 다시 보이면, 이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라도 낼까 봐 무서웠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견디러 갔다. 그 감각이 대체 뭔지, 어디서 시작된 건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