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회가 선언된 회의실 밖 복도에서 문세영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강진우를 안내했는데,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딱, 딱, 딱 소리가 마치 초침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쫓기듯 그녀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 따라오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이쪽이에요, 서둘러요."
계단을 내려가자 복도의 공기가 눅눅해지며 벽면에 낡은 페인트가 벗겨진 흔적이 드러났는데, 협회 지하에 자리한 자료 보관실은 지원 예산이 부족한 부서답게 형광등 몇 개가 깜빡거리며 겨우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 깜빡임은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숨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지지직, 지지직···
"여기서라면 아무도 우릴 신경 안 써요. 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문세영은 낡은 캐비닛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는데,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탓인지 끼익하는 마찰음이 좁은 공간을 울렸고, 그 안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들을 꺼내 책상 위에 쌓아 올리며 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르는 것을 손으로 휘저어 내쫓았다.
"이걸 보시면 알 거예요."
그것은 지난 오 년간 협회가 처리한 던전 관련 예산 배분표와 다이버 사망 및 이탈 통계였는데, 종이 위에 인쇄된 숫자들은 무미건조했지만 그 이면에 담긴 의미는 결코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강진우는 자료를 훑어보며 눈살을 찌푸렸는데, 표면적으로는 신진 다이버 지원 명목의 예산이 매년 편성되어 있었지만, 실제 지출 항목을 뒤져보면 그 대부분이 상위 랭커 경호와 홍보성 이벤트, 그리고 임원들의 접대비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사실이야?"
"네. 상위 랭커들이 계속 이름값을 유지해야 협회가 국제적으로 위신을 세울 수 있으니까, 예산이 전부 그쪽으로만 몰려요. 반면 하위권이나 신입은 그냥 소모품이에요."
'그러니 죽어나가는 거군.'
강진우는 서류를 넘기며 협회의 구조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뒤틀려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는데, 마석 채집꾼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착취 구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고, 숫자로 환원된 죽음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속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항목은 뭐지. 이렇게 큰 금액이 그냥 '기타 운영비'로 처리되어 있는데."
"그게 제일 문제예요.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하나씩 추적해보니까 결국 상위 랭커들 개인 경호팀 유지비랑 그쪽 소속사 같은 곳으로 흘러가는 돈이더라고요."
"그래서 네가 세우려는 계획이 뭐지?"
"중견급, 신진급 다이버들을 위한 별도 훈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예요. 실전 경험이 있는 은퇴 다이버나 숨겨진 실력자들을 강사로 초빙해서,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려고요."
문세영은 그렇게 설명하며 강진우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 속에는 이미 그를 그 '숨겨진 실력자'의 자리에 세워둔 확신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나를 강사로 쓰겠다는 거야?"
"네. 선생님만큼 실전을 아는 분이 없잖아요."
강진우는 잠시 침묵했는데, 이 계획이 결국 자신을 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의 중심부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피해온 방향이었다.
'귀찮은 일에 또 발목이 잡히는군.'
하지만 조금 전 회의실에서 마주친 박 상무의 냉소적인 표정, 그리고 무기력하게 소모되는 다이버들의 통계를 떠올리자, 강진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작게 움직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불편함이었다.
그는 서류의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잉크가 조금씩 번지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뇌리에는 회색 갈래숲에서 마주쳤던 어느 다이버의 지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은, 이 계획이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해."
강진우가 그렇게 말하자 문세영의 얼굴이 밝아졌는데,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이 문제에 자발적으로 관심을 보인 순간이었고, 그녀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노트북 가방을 열었다.
"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녀는 노트북을 열어 미리 작성해 둔 기획서를 화면에 띄웠는데, 그 안에는 예산 대비 효율을 강조한 표와 함께, 성공 사례로 삼을 시범 다이버 후보들의 명단까지 정리되어 있었고, 화면이 켜지며 나오는 파란 불빛이 어두운 자료 보관실을 잠시 밝혔다.
"먼저 소규모로 시범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성과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위원회도 예산을 아예 무시할 수 없을 거고요."
"시범 대상은 누구로 할 건데."
"D급에서 C급으로 못 오르고 정체된 다이버들 중에서,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인원들을 골랐어요."
문세영이 명단을 보여주자 강진우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는데, 그중 몇몇은 실제로 그가 던전 현장에서 스쳐 지나가며 눈여겨보았던 얼굴들이었다.
"이 녀석, 회색 갈래숲에서 본 적 있는데."
"맞아요, 선생님이 언급하신 사람 중 하나예요."
"성장 속도가 느린 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야."
강진우는 서류를 넘기며 자신도 모르게 진지해진 표정으로 계획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캐물었는데, 훈련 커리큘럼의 순서는 어떻게 짤 것인지, 실전 투입 시기는 언제로 잡을 것인지, 시범 인원의 안전 보장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물었고, 이는 그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가르치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문세영은 그런 그의 태도 변화를 조용히 관찰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동시에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억눌러왔는지를 짐작하며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세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표정을 어둡게 바꾸었는데, 강진우는 그 급격한 분위기 변화를 눈치채며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박 상무님이, 사실 이번 위원회의 실질적 결정권을 거의 다 쥐고 있어요. 그분이 반대하면 다른 위원들도 웬만하면 따라가요."
"왜 그렇게까지 힘이 센데?"
"위원회 예산 배분 자체가 그분 손에서 나오니까요. 게다가···"
문세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목소리를 더욱 낮췄는데,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강진우로 하여금 다음 말의 무게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박 상무님이 다이버 후원 사업을 개인적으로도 운영한다는 얘기가 있어요. 상위 랭커들을 자기 인맥으로 관리하면서, 협회 예산과는 별개로 사적인 이익을 챙긴다는 소문이요."
'역시, 그런 구조였군.'
강진우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이 짐작했던 부패의 형태가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느꼈는데, 이런 사적인 이익 구조가 있다면 신진 다이버 양성이라는 계획은 그 이익 구조를 정면으로 침범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 제안이 통과되면, 박 상무 입장에서는 자기 밥그릿에 큰 구멍이 생기는 셈이겠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이걸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먼저 소규모로 성과를 보여주고 다른 위원들의 지지를 확보한 다음에, 박 상무님이 정면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문세영이 전략을 설명하는 도중, 자료 보관실 문이 갑작스럽게 벌컥 열리며 젊은 남자 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쾅!
"문 대리님, 큰일 났어요!"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계단을 뛰어 내려온 듯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뭔데요, 이렇게 갑자기."
"박 상무님이 방금 회의 재개를 선언했는데, 신진 다이버 양성안을 아예 안건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했대요!"
문세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미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였지만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닥쳐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고, 손에 쥐고 있던 서류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지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럴 리가, 아직 발언 기회가 남아 있었잖아요."
"그게, 박 상무님이 절차상 문제를 지적하면서 참고인 발언 자체를 무효화했다는 거예요. C급 다이버의 발언은 위원회 규정상 정식 증언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또 그 등급 타령이군.'
강진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는데, 결국 그가 아무리 진실을 말하더라도 시스템 자체가 그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지워버리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명료해지고 있었다.
'등급이라는 숫자 하나로 사람의 말을 통째로 지워버리다니. 이래서야 처음부터 게임의 규칙이 정해져 있었던 셈이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 관절에서 미세하게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다시 손을 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요."
문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는데,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강진우는 놓치지 않았고, 그녀가 노트북을 가방에 쑤셔 넣는 동작조차 평소보다 서툴러 보였다.
"지금 다시 회의실로 올라가야 해요. 발언권을 다시 요청할 거예요."
"그게 통할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끝이에요."
문세영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결기가 뒤섞여 있었는데, 그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담긴 눈으로 강진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각오를 다진 사람의 표정이었고, 강진우는 그녀의 그 표정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빨리 판이 뒤집히려 하는군.'
그가 문세영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서류 더미를 대충 정리해 옆구리에 끼워 넣는 사이, 젊은 직원은 여전히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나섰다.
서류 보관실을 나서는 세 사람의 발걸음 뒤로, 형광등 하나가 다시 깜빡거리며 위태롭게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고, 그 불안정한 빛이 마치 지금 이 상황 전체를 축약해 보여주는 듯했다.
지지직···
깜빡, 깜빡···
복도 저편에서 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