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만사귀찮은 세계 1위

1화

강진우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전의 햇살이 유난히도 눈을 찔러온다고 느끼며 겨우 눈을 떴는데, 알람은 벌써 세 번이나 울리다 지쳐 꺼진 뒤였고 방 안의 먼지 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아 그는 잠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기만 했다. '또 늦었군.' 천장의 얼룩진 벽지 무늬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그 무늬가 몇 년째 변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으로 번져 있는 것을 보며 문득 자신의 삶도 저 얼룩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그저 아침의 나른한 감상일 뿐이라 여기고 이내 지워버렸다. 오늘도 다르지 않은 하루가 될 것이라는 예감은 언제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그는 몸을 일으켜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는데,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비해 딱히 늙어 보이지도 그렇다고 젊어 보이지도 않는 애매한 인상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얼굴을 씻어내던 그는, 물기 어린 눈매 사이로 언뜻 스치는 옛 기억 하나를 애써 밀어냈는데, 그것은 아주 오래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의 잔상이었으나 그는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습관처럼 고개를 흔들어 흩어버리곤 했다. 서둘러 대충 걸쳐 입은 채집용 방호복은 이미 몇 년째 같은 것을 기워 쓰는 물건이었고, 어깨 쪽 봉합선이 조금씩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을 몇 달째 미루고 있었는데, 그것은 딱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눈에 띄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오래된 습성 때문이었다. 낡은 냉장고에서 대충 물병 하나를 꺼내 든 그는, 유통기한이 이미 사흘 전에 지났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뚜껑을 열어 들이켰다. 협회에서 지정한 C급 던전, '회색 갈래숲'으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 그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다이버들이 소곤거리며 그를 흘겨보는 시선을 그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아저씨 또 지각할 뻔했나 보네." "마석 채집이나 겨우 하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작년에도 그렇고 재작년에도 그렇고, 저 사람 등급이 왜 아직도 C급인지 모르겠어. 십 년 넘게 다이버 생활했다는 것 같은데." "관심 없어, 그냥 조용히 자기 몫만 하고 가는 사람이잖아." 그런 말들이 들려도 강진우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저 하품을 삼켰는데, 그것은 굳이 반박할 가치를 못 느껴서였고, 동시에 자신이 정말로 그 정도의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스스로도 반쯤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 년이라니, 벌써 그렇게 됐나.' 버스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흘러가는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자신이 이 지루한 반복을 몇 번째 견디고 있는지 세어보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는데, 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 협회 소속 관리인이 명단을 확인하며 그를 향해 무성의하게 손짓했고, 강진우는 다른 십수 명의 C급 다이버들과 함께 어두운 갱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살갗에 감기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언제나 비슷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이는 던전 특유의 마나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회색 갈래숲은 이름과 달리 나무 한 그루 없는 잿빛 암반 지대였는데, 낮은 등급의 마물들이 서식하며 채집꾼들을 습격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곳이었고, 그런 만큼 협회는 이곳을 신입이나 저등급 다이버들의 실전 훈련장 겸 착취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바닥을 뒤덮은 잿빛 돌가루가 발걸음마다 뽀얗게 일어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마석의 결정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삽으로 흙을 파헤치던 강진우의 귓가에 낮은 그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르르릉··· 등급 표기로 3등급, 사람 몸통만 한 잿빛 늑대 형상의 마물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는데, 옆에 있던 신입 채집꾼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광경을 본 강진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삽을 내려놓았다. '하아, 또 이거군.' 주변의 다른 다이버들도 그제야 뒤늦게 무기를 꺼내려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마물은 이미 신입의 목덜미를 향해 도약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물이 신입의 목덜미를 노리고 도약하는 그 짧은 순간, 강진우의 발밑에서 그의 그림자가 스르륵 일어나 늑대의 다리를 붙잡아 챘는데, 이는 그가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그림자 조종술이라는 힘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실체처럼 다루어 상대를 제압하거나 구속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촤아아악. 그림자에 발목을 잡힌 늑대가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고, 강진우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삽을 들어 마물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내려찍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탓에 주변 사람들은 그저 그가 운 좋게 마물을 처리했다고만 여겼다. 퍽. 정수리가 함몰된 늑대는 짧게 울부짖다가 스르르 몸을 늘어뜨렸고, 그 사체 위로 옅은 빛이 감돌며 자그마한 마석 하나가 튀어나와 바닥에 굴렀다. "어어, 아저씨 잘 잡네요?" 신입 채집꾼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엉덩이를 털며 물었고, 강진우는 그를 대충 일으켜 세워주며 대답했다. "그냥 운이지." 그는 짧게 대답하며 마석을 회수했는데, 정작 그의 그림자가 늑대를 넘어뜨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강진우는 그런 무관심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원하는 안전한 삶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에 띄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해.' 주변 다이버들이 서로 낮게 감탄사를 흘리며 다시 자기 자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다시 삽을 들고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그 손끝은 조금 전의 격렬한 움직임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무심하고 능숙하게 흙더미를 골라내고 있었다.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강진우는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데워 먹으며 텔레비전을 켰는데, 화면에는 세계 던전 랭킹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세계 랭킹 3위 유은설 선수가 유럽 SS급 던전을 단독으로 클리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앵커의 목소리에 뒤이어 화면 속에 젊은 여성 다이버가 클리어 트로피를 들고 미소 짓는 모습이 비쳤는데, 강진우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많이 컸네, 저 녀석.' 화면 속 여성의 눈매가 언뜻 예전 그가 가르치던 시절의 앳된 얼굴과 겹쳐 보였는데, 그때는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도 못해 매번 바닥을 굴렀던 아이가 지금은 세계 랭킹 3위라는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뉴스는 이어서 세계 랭킹 2위, 4위, 7위 다이버들의 근황을 짧게 소개했는데, 하나같이 그가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었고, 세계 랭킹 1위 자리는 여전히 공백이라는 자막이 화면 아래 흘러가는 것을 보며 강진우는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바꿔버렸다. '그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니까.'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정작 왜 자신이 그 자리를 피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것은 오래된 습관이었고 동시에 그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견고한 벽이기도 했다. 바뀐 채널에서는 시시껄렁한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화면을 향해 있어도 정작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는데,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방금 본 제자들의 얼굴이 잔상처럼 남아 어른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으려는 순간, 탁자 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명은 '문세영'이었고, 강진우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는데, 이는 그녀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항상 귀찮은 일이 뒤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에?' 시계를 흘긋 확인한 그는, 밤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전화를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세영이에요,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는 평소의 밝은 기운이 사라지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조급함이 짙게 배어 있었고, 강진우는 그 낌새를 알아차리며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인데." "드릴 말씀이 많은데, 전화로는 좀 어려워서요. 저 지금 선생님 댁 근처인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근처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진우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는데, 문세영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밤늦게 여기까지 올 정도의 일이면···'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가쁘게 느껴진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급박한 상태로 이곳까지 왔는지를 짐작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일으켰다. 딩동.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고, 강진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벌써 왔다고?'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여전히 무언가를 다급히 설명하려 하고 있었지만, 초인종 소리에 놀란 강진우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향해 뻗어가는 그의 손끝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소용돌이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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