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계 3년, 산골로 추방되다

4화

### 4화 짐을 싸는 데는 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캐리어를 펼쳐놓고 무엇을 넣을지 고민하는 시간조차 필요 없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사라진 자리에, 남은 물건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옷장을 열었을 때 나는 잠깐 멈춰 섰다. 걸려 있는 옷들 중 절반은 이제 몸에 맞지 않았다. 이계에서 지내는 동안 근육의 결이 달라졌고, 걸음걸이도 달라졌고, 무게중심을 잡는 방식조차 달라졌다. 셔츠 몇 벌과 바지 두 벌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옷장에 남겨두었다. 어차피 이 집도 정리할 사람이 없었다. 조리도구 세트는 따로 챙겼다. 식당에서 삼 년을 일하며 익힌 손기술이, 이계에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쓸모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칼을 쥐는 방식, 재료의 결을 읽는 감각, 불의 세기를 몸으로 짐작하는 습관. 그런 것들은 세계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낡은 손칼 하나. 이계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손잡이는 오래 쥔 탓에 반질반질했고, 날에는 몇 번이나 다시 갈아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칼로 무엇을 얼마나 썰고, 다듬고, 때로는 방어했는지 세어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았지만, 굳이 세지 않았다. 그 칼을 캐리어 맨 아래 칸에 넣으면서, 나는 이것이 지금 내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온전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했다. 옷 몇 벌, 조리도구 한 세트, 낡은 손칼 하나. 삼 년을 살아낸 대가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서울역에서 강원도행 버스로 갈아탈 때, 소라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배, 죄송해요." 딱 그 한 줄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첫 번째는 그냥 읽었고, 두 번째는 행간에 뭔가 더 있을까 싶어서 읽었고, 세 번째는 확인하기 위해서 읽었다.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에는 미안함이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말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 남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스스로에게 발급하는 면죄부 같은 것. 삼 년 전에도 그런 식이었고,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새삼스럽게 확인했을 뿐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보낼 이유가 없었다.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면서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빌딩이 산으로, 도로가 계곡으로, 신호등이 이정표로 바뀌는 그 과정을 나는 말없이 지켜봤다. 창에 이마를 기댔더니 유리의 냉기가 피부에 그대로 전해졌다. 이계에서는 유리라는 것 자체가 귀했다. 이런 사소한 감각조차, 지금은 낯설게 다가왔다. 버스 안 승객들은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등산복 차림의 노인 몇 명,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그리고 나.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삼 년 만에 돌아온 세상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승객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줬다. 고향집은 태백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산골에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아무도 살지 않은 지 오래된 집, 방치된 밭,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싸고 있는 산 하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벌써 오 년 전이었다. 그 뒤로 나는 집을 정리하지도, 팔지도 못한 채 그냥 내버려뒀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으면 다시 오겠다는 다짐만 남긴 채로. 그리고 그 다짐을 지키기도 전에, 나는 이계로 끌려갔다. 돌아와 보니 이 년이 아니라 오 년이 흘러 있었다. 집은 더 낡았을 것이고, 밭은 완전히 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곳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나는 그 산의 이름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저 '그 산'이라고만 불렀으니까. 지도에는 분명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겠지만,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항상 그거였다. 그 산. 마치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인 것처럼. 버스 종점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 지 사십 분쯤 지났을 때, 해가 완전히 기울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이었다.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에 의지해 걷다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손전등을 끄고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달빛이 그럭저럭 밝은 밤이었다. 산길로 접어드는 초입에서, 나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칠 뻔했다. 산에서 나는 소리는 대체로 무의미하니까.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작은 짐승이 낙엽을 밟는 소리, 그런 것들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는 이상한 규칙성이 있었다. 탁, 하고 멈췄다가, 다시 탁, 하고 이어지는 간격. 짐승이 무심코 지나가며 내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상처 입은 것이 힘겹게 움직이며 내는 소리였다. 이계에서 나는 이런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다친 동료가 은신처를 찾아 기어갈 때, 딱 이런 리듬으로 낙엽과 나뭇가지를 밟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걸음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틀어졌다. 소리를 따라 덤불 쪽으로 다가갔을 때, 나는 그것을 봤다. 하얀 털에 검은 얼룩이 섞인 고양이였다. 크기가 일반 고양이보다 확연히 컸다. 대략 소형견 정도는 될 것 같은 몸집이었다. 눈동자는 사람의 것처럼 세로로 좁아지지 않고 동그란 채였고, 달빛 아래에서 그 눈은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눈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이상한 위압감을 느꼈다. 몸집은 작았지만 눈빛에는 산 하나를 짊어진 듯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뭔가를 지켜온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이계에서 나는 그런 눈빛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은 신수, 혹은 그에 준하는 격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고양이의 다리 한쪽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몸통 곳곳에 얕은 상처가 나 있었고, 어떤 상처에서는 옅게 마력의 흔적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력의 흔적이 그 상처 주위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걸, 나는 즉시 알아챘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옅은 광채였지만, 삼 년 동안 이계에서 갈고닦은 감각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건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괜찮아?" 나는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고양이가 나를 노려봤다. 경계와 적의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의 언어로 대답했다. "괜찮아 보이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었다. "저리 가라. 인간 따위 도움 필요 없다." 말하는 고양이. 나는 그 순간 이계에서 마주쳤던 존재들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인간의 언어를 쓰는 짐승들이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격을 갖춘 존재라면 인간의 말을 배우는 게 당연했다. 지식과 격은 대체로 비례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이 산속에서, 한국의 강원도 산골에서 그런 존재를 마주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수인가." 내가 물었다. 고양이의 눈이 커졌다. 그건 놀람이었고, 동시에 경계였다. "인간이 그 단어를 알아?" "이 정도 마력 흔적이면 짐작이 가능하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짐작 이상이었다. 이계에서 나는 신수급 존재들과 몇 번이나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들의 마력 파동이 인간이나 일반 몬스터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몸으로 익혔다. 파동의 결이 다르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일반 몬스터의 마력은 거칠고 날카로운 반면, 신수급의 마력은 무겁고 안정적이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 고양이의 파동은 확실히 그 범주에 속했다. 다만 지금은 그 파동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마치 두꺼운 나이테 사이사이가 벌레 먹힌 것처럼, 곳곳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이 산 전체를 지배했다." 고양이가 말했다. 자존심을 세우려는 목소리였지만, 그 아래로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지금은... 사소한 이유로 힘을 잃었다. 곧 회복될 거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나는 상처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러진 다리는 최소 며칠 전에 다친 것 같았다. 뼈가 어긋난 채로 방치된 시간이 길수록 회복은 느려지고, 감염의 위험은 커진다. 게다가 마력의 흐름이 상처를 통해 계속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건, 자연 치유가 아니라 지속적인 소모를 의미했다. 힘을 잃은 신수, 그것도 상당 기간 방치된 상태로 보이는 부상. 이대로 두면 아침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순식간에 섰다. 숫자로 따지자면, 지금 새어 나오는 마력의 속도와 남아 있는 양을 대충 어림잡아도, 앞으로 대여섯 시간이 한계였다. 정확한 셈은 아니었지만, 대충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움직이지 마." 나는 배낭에서 조리도구 대신 응급 처치용 천을 꺼냈다. 이계에서 부상당한 동료들을 몇 번이나 치료했던 경험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는 손놀림, 지혈을 위해 압박하는 위치, 붕대를 감는 각도까지.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라!" 고양이가 이빨을 드러냈지만, 그 위협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고양이는 결국 다시 주저앉았다. 그 순간 나는 짧게 고양이의 호흡을 살폈다. 얕고 빨랐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잃고 낙향하는 밤, 하필이면 이 산길에서, 하필이면 힘을 잃은 신수와 마주친다는 것. 이계에서 삼 년을 보내며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우연이 셋을 넘으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낙향, 산길, 신수. 셋이 겹쳤다. 하지만 그 생각을 더 이어갈 겨를도 없이, 고양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이봐." 나는 손을 뻗었다. "일단 내 집으로 가자. 거기서 상처를 봐야겠다." 고양이는 대답 대신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자존심과 절박함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걸 읽었다. 산 하나를 지배했다는 자가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이 존재에게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지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몸이 이미 한계였다. 고양이의 앞발이, 아주 미세하게, 나를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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