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빅데이터 서생, 천하를 읽다

1화

서생들 사이에서 나만 혼자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훈장님이 헛기침을 두 번 하시더니 종이 뭉치를 탁탁 정리했다. 그 소리만으로도 다들 등을 곧추세웠다. "이번 모의시험, 상위 십 등 안에 든 놈이 누구냐?" 훈장님이 물었다. "저요! 저요!"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스무 명 남짓한 서생 중에 열댓 명이 손을 든 것 같았다. 저러다 훈장님이 다 맞다고 해줄 것 같은 기세였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저 중에 실제로 십 등 안에 들 확률이 있는 놈은 셋뿐인데.' 표본이 뻔했다. 지난 다섯 번 모의시험 성적, 필체의 안정도, 심지어 답안지에 밥풀 자국이 몇 개 묻었는지까지. 나는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 옆에 앉은 박서방네 둘째 놈은 시험 전날마다 유독 하품을 많이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곧 전날 밤 늦게까지 벼루를 갈았다는 뜻이었고, 벼루를 늦게까지 가는 날은 성적이 좋았다. 이런 걸 신경 써서 기억하는 놈이 이 시대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전생에 나는 MIT에서 데이터 분석학으로 박사를 딴 사람이었다. 뭐, 지금 이 세상엔 MIT도 없고 박사도 없다. 혜성이 하늘을 가르고 지나간 뒤로 천하가 다섯 조각으로 쪼개진, 그런 난세였다. 중경국, 동래국, 서라국, 남평국, 북연국. 다섯 나라가 서로 눈을 부라리는 와중에, 나는 그중 중경국의 어느 소도시 상인가 셋째 아들로 다시 태어난 거였다. 이름은 이겸. 올해 열일곱. 체구는 왜소한 편이었지만 머리는 팽팽 돌았다. 돌 수밖에 없었다, 전생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 가끔은 억울하기도 했다. 남들은 무공 좀 배웠다더라, 신비한 스승 만났다더라 하는 그런 판타지스러운 회귀를 하는데, 나는 고작 통계 좀 다뤄본 게 전부인 채로 이런 무협풍 세상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이럴 거면 검술이라도 좀 익혀서 오지, 데이터 분석이 여기서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생각한 게 벌써 몇 년째인데, 웃긴 건 그게 진짜로 소용이 있더라는 거다. "이겸아, 넌 왜 손을 안 드냐?" 옆자리 서생이 물었다.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아마 최가네 첫째였던 것 같다. "어차피 정답은 정해져 있는데 손 들어봐야 뭐 하나." 나는 대충 대답했다. '십 등 안에 든 세 놈 중 하나는 나고.' 속으로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에라이, 재수 없는 소리 하고는." 최가네 첫째가 눈을 흘겼다. "내가 언제 틀린 소리 한 적 있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녀석이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 훈장님이 답안지를 꺼내 들었다. 실제로 채점이 끝나자 내 이름이 두 번째에 걸렸다. "오, 겸이 이번에도 잘했구나!" 훈장님이 흡족하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겸손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데이터가 말해주는 걸 그냥 따라간 것뿐인데.'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중 몇몇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몇몇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 상관없었다. 표본이 작은 집단의 여론이란 원래 그렇게 요란하고 금세 사그라드는 법이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곧 다가올 소과, 그러니까 동자시라 불리는 이 지역 첫 관문 시험 때문이었다. 합격만 하면 정식으로 서원에 입학할 자격이 생긴다. 서원이라는 게 뭐냐면, 이 시대판 명문대 같은 곳이었다. 유가 명륜서원, 법가 형정서원, 묵가 겸애서원, 도가 청허서원, 그리고 음양가 오행서원. 각 서원마다 뽑는 인원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또 파벌이 갈렸다. 전생으로 치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냐로 인생 절반이 결정된다는 그 논리랑 똑같았다. 다만 여기서는 학벌이 곧 신분이었고, 신분은 곧 목숨줄이었다. 길을 걷는 내내 나는 서원별 입학 정원과 최근 삼 년간 합격자 출신 성분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습관이었다. 전생에 논문 쓰던 버릇이 남아서, 이렇게 걸으면서도 데이터를 굴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했다. '명륜서원 정원 서른, 그중 상인가 출신은 작년 기준 두 명뿐이었지.' 그러니까 나 같은 상인가 셋째 아들이 명륜서원에 들어가려면, 웬만한 사대부가 자제보다 훨씬 압도적인 성적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뭐, 어쩌겠어. 압도적으로 잘하면 되지.' 간단한 결론이었다. 문제는 그 간단한 결론을 실행하는 게 늘 간단하지 않다는 거였다. 집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대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뭔가 싸했다. 평소라면 하녀들이 마당을 오가며 저녁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버지 이덕수의 서재 문이 평소와 다르게 꽉 닫혀 있었다. 곡식 무역으로 돈을 번 우리 집은 그래도 이 동네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가였는데, 아버지가 저렇게 서재 문을 닫아놓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서 장부 얘기며 곡물값 얘기를 늘어놓는 게 아버지 스타일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나는 문 앞에서 인사를 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 다급하게 종이를 접는 소리 같았다. 그것도 한두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을 급하게 뒤섞는 소리였다. "어, 어! 겸이냐! 잠깐만 기다려라!" 아버지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뭐야, 이거 되게 수상한데.' 전생에 감사 나온 조사관이 사무실 열쇠 못 찾아서 허둥대는 소리를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데, 딱 그 톤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아버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에 땀이 살짝 배어 있었고, 옷깃도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아, 아니다! 그냥 장부 정리 좀 했다!" 아버지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 발밑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미처 못 챙겼다. 나는 그걸 슬쩍 주웠다. 아버지는 그 순간 다른 서류를 정리하느라 미처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정보: 이덕수, 관계자 매수 관련 서류 발견] 숫자가 눈에 딱 박혔다. 이만 냥. 소과 관계자에게 전달된 돈, 정확히 이만 냥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생 감각으로 환산하면 그게 대체 얼마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일 년 순수익의 몇 배는 되는 돈이라는 것쯤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아버지." 나는 목소리가 살짝 흔들리는 걸 애써 눌렀다. "이게 뭡니까?" 아버지가 종이를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별거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크고 어색했다. 평소 아버지가 저렇게 어색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있었나 곱씹어봤는데, 없었다. "별거 아닌 게 이만 냥이나 들어갑니까?" 나는 캐물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겸아. 이건 다 널 위해서다." 아버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소과 시험, 관계자 쪽에 손을 좀 써놨다." [경고: 뇌물 발각 시 가문 전체 몰락 확정] 순간 머릿속에 저 문장이 그대로 떠올랐다. 마치 어디선가 상태창이 뜬 것처럼, 너무 또렷하게. '와, 이건 뭐 게임에서 최종 보스 등장할 때 뜨는 경고문 수준인데.' 웃을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헛웃음이 났다. 전생에 이런 경고문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만약 신이 나한테 인생 게임의 시스템 창을 하나 붙여준다면 딱 저런 식으로 뜰 것 같았다. 빨간 글씨로, 느낌표 세 개쯤이면서. "아버지, 이거 발각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발각될 리가 없다! 다들 알음알음 그렇게 하는 거야!" 아버지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알음알음이 문제라는 걸 아버지는 모르시는구나.' 표본이 몇 개 정도 되는지 아버지가 알고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전생 통계 이론으로 치면 이런 부정행위는 발각률이 낮아 보여도, 시행 횟수가 누적되면 결국 표본 전체에서 몇 건은 반드시 걸린다. 그 몇 건 중 하나가 우리 집이 안 될 거라는 근거는, 솔직히 어디에도 없었다. 소과의 관계자 매수, 만약 이게 밝혀지면 단순히 시험 취소로 끝나지 않는다. 중경국 법으로는 부정 합격이 드러난 가문은 재산 몰수와 함께 삼족까지 관직 진출이 금지된다. 장사꾼 집안이 그런 낙인이 찍히면 사실상 끝이었다. 장사도 결국 관과 연결되어야 크게 굴러가는 세상인데, 그 연결이 완전히 끊긴다는 뜻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쌓아온 곡물 무역 인맥도, 거래처도, 전부 다 물거품이 될 거였다. "아버지."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 돈,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이미 건넸다." 아버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든든한 상인가 가주가 아니라, 그냥 겁먹은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그럼 답은 하나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남은 선택지는 뻔했다. 실력으로 이 뇌물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그러니까, 내가 진짜로 압도적인 성적을 내서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누가 봐도 실력으로 붙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적표를 만들어내야 했다. 표본 하나 없이 결과값만 놓고 판단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전생으로 치면, 부정 입시 의혹이 나온 학생이 나중에 전국 수석을 해버리면 아무도 그 의혹을 입에 담지 못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나는 서재를 나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거 참, 재밌어지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부정합격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셈이었으니까. 그 폭탄의 심지가 얼마나 남았는지도, 누가 불을 붙일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부터 내가 받는 모든 성적표는, 그 자체로 아버지의 목숨줄이자 우리 가문의 방패라는 것. '하필 이런 타이밍에 소과라니.' 방으로 들어가며 나는 마당에 걸린 달을 잠깐 올려다봤다. 저 달만큼 태연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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