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력 0, 68층의 계약

3화

동쪽 통로 끝에는 작은 공동(空洞)이 있었다. 천장에서 늘어진 덩굴들이 바닥까지 닿아 있다. 그 덩굴 표면에 옅은 청록색 빛줄기가 맥박처럼 흐른다. 숨을 죽였다. 공기 자체가 이상했다. 습기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피부에 감기는 느낌. "이거 봐." 지아가 낮게 속삭였다. "살아 있는 거야?" "확인해보죠." 나는 주머니에서 결정석 하나를 꺼내 던졌다. 바닥에 닿는 순간 덩굴 전체가 옅게 진동했다. 반응이 아까보다 두 배 이상 강해졌다. [미확인 생명체 반응 감지: 마력 흡수 패턴 이상]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떴다. "마력 흡수량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뭔가 반응한 겁니다." "우리한테?" "우리가 가진 마력에요." 말하면서도 등 뒤가 서늘해졌다. 살아 있는 것도 문제인데, 반응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움직이는 미확인 생물은 예측이 안 된다는 뜻이니까. 서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손이 이미 허리춤 무기로 향해 있었다. "물러나자. 이건 조사 범위 밖이야." "동의합니다." 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끄덕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평소라면 먼저 나서서 정리했을 사람인데, 지금은 뒤로 슬쩍 물러나는 쪽이었다. 이상하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그 순간, 덩굴 하나가 꿈틀거렸다. 느리지만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물러나!" 준혁이 소리쳤다. 다들 몸을 돌려 통로 쪽으로 뛰었다. 콰드득! 뭔가가 바닥을 뚫고 솟아올랐다. 뿌리 같은 것이 발밑을 휘감으며 뻗어 나왔다. 검은 흙과 함께 튀어 오르는 파편들이 얼굴을 스쳤다. "함정이다!" 나는 몸을 낮추며 옆으로 굴렀다. 뿌리 하나가 방금 내가 있던 자리를 스쳤다. 서걱. 돌바닥이 그대로 갈라졌다. 한 번만 늦었어도 그 자리에 내 다리가 있었을 거다. "준혁 선배! 후퇴 경로!" 내가 외쳤다. "막혔어!" 통로 입구가 어느새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빽빽하게 얽힌 줄기들이 마치 벽처럼 자라 있다. 뒤를 돌아보니 공동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에서, 벽에서, 사방에서 뿌리와 덩굴이 꿈틀거린다. 마치 던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지아가 검을 뽑아 눈앞의 줄기를 베었다. 서걱, 서걱. 두 번, 세 번. 하지만 벤 자리에서 즙 대신 옅은 빛 입자가 흩어질 뿐, 줄기는 다시 자라났다. "이거 안 죽어!" "재생 속도가 우리 공격 속도보다 빠릅니다!" 서은이 뒤에서 마법을 준비했다. 손끝에 냉기가 응축되는 게 보였다. "길 뚫을 시간 없어. 다른 방법 찾아야 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혁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내려쳤다. 낯선 문양이 새겨진 작은 원판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기호들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내가 물었다. "비상용... 탐색 개방기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 듣는 종류의 떨림이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뭔가를 숨기려는 자의 다급함.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왜 이런 물건을 준비해 뒀을까. 평범한 던전 조사팀이 이런 걸 왜 갖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 의문을 풀 시간조차 우리에겐 없었다. 원판이 빛을 뿜었다. 발밑 바닥이 소용돌이처럼 일그러진다. 빛이 점점 강해지며 시야를 잠식했다. "뭘 한 겁니까!" "막힌 통로를 뚫으려고... 였어!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이 완전히 사라졌다.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감각. 몸이 아래로, 위로, 사방으로 끌려간다.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시야가 하얗게 지워졌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리가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뭉개졌다. 잡으려던 손이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다음 순간, 나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목이 갈라졌다. 겨우 낸 소리였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을 짚고서야 겨우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공기가 다르다. 습하고 짙은, 마력이 응결된 냄새. 숨 쉴 때마다 폐 안쪽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6층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야." 서은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녀 역시 다리가 풀린 듯 벽을 짚고 서 있었다. 지아는 아직 바닥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다. 준혁만이 유독 빨리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이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근처 벽면에 새겨진 층수 표식을 찾았다. 돌에 깊게 파인 숫자. 68. 숨이 턱 막혔다. 한 번 더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68층입니다." "뭐?" 지아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68층이면— 인류 미도달 구역이잖아!" 인류 최고 도달 기록은 42층. 그 이후는 지도조차 없는 곳. 탐사대들이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죽음의 경계선 너머. 서준혁이 그 무언가를 작동시킨 순간, 우리는 그 미지의 구역으로 통째로 끌려온 것이다. "준혁 선배." 내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목소리에 힘을 눌러 담았다. 화를 내는 것보다 침착하게 묻는 게 지금은 필요했다. "그 원판, 정확히 뭡니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이 몇 번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몰랐다는 게 아니라, 알고서도 썼다는 표정. 무언가 준비된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계획에 낀 거고.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대답해요." 서은이 낮게 눌러 말했다. "이건... 나중에. 지금은—" 그때 어둠 저편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지진처럼 바닥이 흔들린다. 두웅. 두웅. 일정한 간격의 울림. 발소리 같았다. 너무 크고, 너무 무거운. 한 걸음마다 돌바닥에 잔진동이 퍼진다. 다리 끝까지 그 울림이 타고 올라왔다. "...뭐야, 이 소리." 서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언제나 침착하던 그녀가 그렇게 흔들리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지아가 내 팔을 꽉 붙잡았다.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눈을 떴다. 노랗고 거대한, 사람 키의 열 배는 될 법한 두 개의 눈동자. 그것이 우리 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도망칠 곳도, 돌아갈 방법도 없는 68층 한가운데에서.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