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숙소로 돌아온 나는 짐을 정리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옷가지와 연금술 도구들을 상자에 담는 손길이 평소보다 거칠었는데, 그것은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도가니와 증류관을 천에 감싸 넣으면서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나는 그게 추워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에게 우겨봤다. 방 안 온도는 딱히 낮지 않았다.
'시골이라니, 거기 가서 뭘 하라는 거야.' 나는 상자 속에 도구들을 던져 넣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5급 마술사 자격증에, 국가 공인 연금술사 인증까지 받은 몸이 이제 와서 청하리라는, 지도에서 찾으려면 한참 헤매야 할 촌구석으로 발령이라니. 108개 팀에서 쫓겨난 것도 억울한데, 그 뒤처리로 나를 보내는 곳이 도시 한복판도 아니고 논밭 냄새 나는 동네라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전생에도 이런 식으로 좌천당한 적이 있었나, 하고 잠깐 딴생각을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애초에 전생에는 좌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때는 그냥 죽으면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는 식이었지.
그때, 방구석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비였다.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해온 사역마이자,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검은 털이 방 안의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윤이 났고, 꼬리 끝이 느릿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저 꼬리 흔드는 속도, 저건 분명히 한마디 하려는 전조였다.
"짐 싸는 소리가 꼭 화풀이 같네." 나비가 낮게 말했다. 사역마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였는데, 그 안에 담긴 어조는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나는 상자를 닫으며 대답했다. "화풀이가 아니면 뭐겠어. 108개 팀에서 쫓겨나고, 이제는 아예 시골로 유배당하는 처지인데." 말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좀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비는 소파에서 뛰어내려 내 발치로 다가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형광빛으로 반짝였는데,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기가 살짝 불편했다. 마치 저 눈이 내 머릿속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준아, 솔직히 말해줄까?" 나비가 물었다. 나는 손을 멈추고 나비를 바라보았다. 이 고양이가 이런 어조로 말을 걸 때는 대개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할 때였다. 지난 백 년 가까이, 아니, 정확히는 내가 이 몸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나비가 이런 톤으로 입을 열었을 때 좋은 소리가 나온 적은 손에 꼽았다.
"말해봐." 나는 짐짓 여유롭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긴장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짐을 계속 싸는 게 나을지, 아니면 순순히 들어주는 게 나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나비는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할 말은 다 할 놈이었다. "이번 일, 황태준 그 자식 탓만 하면 마음은 편하겠지. 그런데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니야." 나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날카로웠다. 나는 순간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넌 함께 일한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이름을 제대로 기억 못 하잖아. 어제 회의에서 네 옆에 앉았던 사람 이름이 뭐였는지 말해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았다. 회의실 풍경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의 이름만 뻥 뚫린 것처럼 비어 있었다. 심지어 그날 회의에서 내 도면을 검토해준 동료의 얼굴조차 흐릿했다. 안경을 썼던가, 아니면 머리가 짧았던가. 기억을 더 끄집어내려 애쓸수록 그 자리에는 형체 없는 그림자만 남았다. 나비는 그 침묵을 답으로 받아들인 듯 나지막하게 이어 말했다. "넌 사람을 도구처럼 대해. 필요할 때만 봤다가, 필요 없어지면 지워버려. 나는 널 오래 봐왔으니까 알아. 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재는 감각이 아예 없는 거지."
나는 그 말을 듣고서 헛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웃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대신 가슴 안쪽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부끄러움인지 억울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반박을 하고 싶었다. 아니야, 나도 사람을 아낄 줄 알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내려니 근거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근거를 대려면 예시가 필요한데, 예시를 대려면 이름이 필요했고, 이름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랬을걸." 나비가 덧붙였다. 나는 흠칫했다. 나비에게 전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되짚어봤지만, 정확히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비는 늘 그런 식으로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알아챘다. 사역마와 계약자 사이에 흐르는 이 이상한 감각의 공유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나비가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놈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넌 늘 능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했지. 근데 능력으로 인정받는 순간, 곁에 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이번 생도 똑같잖아."
나는 상자 위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반박도 떠오르지 않았다. 강혜란의 말과 나비의 말이 겹쳐지면서, 어떤 불편한 진실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능력만 파고들면 다들 인정은 해줬다. 그런데 인정과 애정은 다른 물건이었다. 인정은 결과물에 붙는 도장 같은 거였고, 애정은... 애정은 애초에 내가 뭘로 얻는 건지도 잘 몰랐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나는 낮게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나비는 내 발치에 몸을 부비며 대답했다. 부드러운 털이 종아리를 스치는 감각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청하리 가서 처음부터 다시 해봐. 사람 이름부터 제대로 외우는 것부터."
그 말이 우습게도 마음에 걸렸다. 사람 이름을 외우는 것부터, 라니. 국가 공인 연금술사이자 5급 마술사인 내가, 그런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긁었지만, 동시에 어딘가 후련한 감각도 있었다. 마치 오래 미뤄뒀던 숙제를 누군가 대신 꺼내 보여준 기분이었다. "이름 외우는 거야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증명해봐. 이번엔 진짜로." 나비의 대답에는 웬일로 장난기가 조금 섞여 있었다.
나는 상자를 다시 열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손길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던져 넣던 손이 이번에는 접어서 넣는 손으로 바뀌어 있었다. 연금술 도구들을 순서대로, 자주 쓰는 것부터 안쪽에 눕히면서, 청하리에 도착하면 뭘 제일 먼저 할지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보고 있었다. 이름부터 외우라고 했으니, 도착하는 즉시 마을 사람들 명단이라도 구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조금 낯설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시간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고,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하며 문을 열자,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