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숙소 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두 번째 봉투가 도착해 있었다. 문틀 아래 반쯤 밀어넣어져 있는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는데, 이쯤 되니 웃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배달되는 불행이라니, 이건 무슨 정기구독 서비스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서서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이번에는 서른일곱 개 팀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전부 내 이름이 배정 취소란에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필체까지 똑같은 걸 보니 한 사람의 손을 거쳐 찍혀 나온 문서라는 게 분명했다. '이거 완전히 목표를 정해놓고 하나씩 찍어내는 수준이군.' 나는 창가에 서서 봉투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생각했다. 종이의 질감이 유난히 매끈했는데, 본부 정식 양식지였다. 정식 양식지에 이런 명단을 이렇게나 여러 번 찍어내려면 결재란을 몇 번이나 거쳐야 했을 텐데,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소름 돋는 일이었다.
황태준 혼자서 이런 규모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의 가문, 그리고 그 가문과 얽힌 다른 귀족들의 이해관계까지 겹쳐져야 이 정도 숫자가 나온다는 계산이었다. 나는 봉투를 침대 위에 던져놓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본부 건물의 불빛들이 아직 몇 개 켜져 있었는데, 저 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이름이 적힌 서류가 어딘가로 넘어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생에도 이런 조직적인 견제는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차라리 정면으로 칼이 날아왔지, 이렇게 서류로 사람을 목 조르는 방식은 처음이었다. '우아하게 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군.' 나는 그렇게 자조하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음 날 아침, 본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상한 시선들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나를 피해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오히려 대놓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 속에는 동정과 흥미가 뒤섞여 있었다. 몇몇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몇몇은 오히려 더 대담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마치 곧 도살장에 끌려갈 짐승을 구경하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로비를 가로질러 걸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는데, 여기서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야말로 저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게시판 앞에 붙은 공고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국가 공인 연금술사 진서준, 총 108개 팀 배정 취소 확정.' 숫자 108이라는 게 참 공교로웠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숫자인데, 하고 잠시 딴생각이 새어 나왔다가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 숫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이 일이 단순한 견제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08개. 본부에 소속된 거의 모든 실무 팀에서 나를 배제한 것이다. 이건 견제가 아니라 매장이었다. 게시판 종이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듯 반질거렸는데, 그 신선함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이야, 이거 참 대단한 기록이군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차현우가 팔짱을 낀 채 게시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본부 소속 연금술사이자 나보다 한 기수 위인 선배로, 나에게 여러 번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회의 석상에서 그의 논리적 오류를 대놓고 짚어준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묘한 앙심 같은 걸 눈빛에 담고 다녔다. 그가 나를 보며 픽 웃었는데, 그 웃음에는 고소함과 함께 묘한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자네를 이렇게 통째로 배제할 정도면, 위쪽에서 뭔가 크게 결심을 한 모양인데." 그는 게시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결심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자존심 문제겠지요. 황태준 마술사, 요즘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나 봅니다."
차현우는 그 말에 잠시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진지하게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운 일이야. 자네 실력이야 나도 인정하는 바니까. 다만…" 그는 말을 끝맺지 않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이미 끝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조의를 표하기 직전의 표정 같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더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저 사람이 순순히 다 털어놓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벗어났는데, 등 뒤로 그의 시선이 한참 동안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로비를 벗어나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시선들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되받아치며 걸었는데, 이럴 때는 오히려 턱을 들고 걷는 게 낫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약해 보이는 순간, 하이에나들이 달려드는 법이니까.
정오가 되기 전, 본부장 비서실에서 호출이 왔다. 강혜란 본부장이 직접 나를 찾는다는 전언이었다. 비서가 전달한 짧은 메모에는 '즉시 방문 요망'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었는데, 그 간결함이 오히려 무게감을 더했다. 강혜란. 내가 고아였던 시절 재능을 알아보고 후견인이 되어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녀가 처음 나를 발견했던 그날의 기억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낡은 실험실 구석에서 혼자 촉매를 만지고 있던 나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지켜보다가 결국 서류 한 장을 들이밀었었다. 그녀 없이는 지금의 나도, 국가 공인 자격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호출을 받으며 오히려 마음이 놓였는데, 강혜란이라면 이 사태를 어떻게든 정리해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본부장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구두 굽 소리가 텅텅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황태준과의 마찰, 회의 석상에서의 지적, 동료들의 굳은 표정들, 그리고 오늘 아침 게시판 앞의 시선들까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별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쌓아놓고 보니 뭔가 불길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마지막 조각이 지금, 이 계단 끝에 있는 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정도로 큰일이 되겠나.' 나는 애써 그 불길함을 눌러 담으며 본부장실 문 앞에 섰다.
문 앞에서 나는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런 순간에도 겉모습을 챙기는 걸 보면, 전생의 습관이 아직 몸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손끝으로 옷깃을 정리하는 동안, 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강혜란과 누군가가 나누는 대화의 끝자락이 언뜻 들렸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보내야 합니다."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비서가 문을 열며 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강혜란의 시선이 정면으로 나를 향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그 눈빛에는 단호함과 함께 어딘가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는데, 그 옆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혜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오늘의 호출이 결코 위로나 정리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는 게 피부로 느껴졌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강혜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