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을 넘는 의붓동생

4화

그 소문을 들은 뒤로 도윤은 며칠간 하린을 은근히 경계했다. 누가 흘린 말인지도 모를 그 소문—어린 것이 오라비를 향해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는, 하녀들 사이에서 수군거려지던 그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래서 그는 하린이 다가올 때마다 한 발 물러서곤 했고, 식사 자리에서도 괜히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으며, 그녀가 무슨 말을 걸어도 짧게만 대답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정작 그 경계심이 무색해진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비가 오는 오후였다. 창밖으로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정원의 나무들이 물기를 머금어 짙은 초록으로 가라앉아 있던 그런 날이었다. 도윤은 서재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정원 한쪽에서 하린이 넘어져 있는 걸 보았다. 처음엔 그냥 앉아 쉬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릎이 까진 채로, 빗물에 젖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걸어오는 그 모습—울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이 도윤의 눈에 이상하게 박혔다.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 멀리서도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그런데도 그녀는 누구도 부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저 참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로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전생의 태리가 아파도 어른들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도 그랬는데.' 넘어지고도 울지 않던 아이. 무릎이 깨져도, 손등이 긁혀도, 어른들이 걱정할까 봐 아무 말 없이 참던 아이. 도윤의 기억 속 태리가 그랬다. 늘 씩씩한 척, 괜찮은 척, 그렇게 자신을 감추던 아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 문을 박차고 나갔고, 빗속을 뚫고 정원까지 달려갔다. 우산도 챙기지 못한 채였다. 그의 옷깃이 금세 빗물에 젖어들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괜찮으냐?" 하린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그가 물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도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무릎의 상처를 눌렀다. 빗물과 섞인 피가 손수건에 붉게 번져갔다.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하린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뭔가를 참는 듯 눈가가 붉어지는 걸 그는 보았다. 빗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는데, 그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도윤은 구분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그녀가 부르는 목소리에 처음으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것이 상처의 통증 때문이라 여기며 손수건을 조금 더 세게 눌러주었을 뿐이었지만, 하린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밀어내지 않았어.' 하린은 속으로 그 사실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목욕물에 들어갔을 때도, 밤에 침대 곁에 앉았을 때도, 오라버니는 화를 냈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았다—그리고 지금, 다친 자신을 이렇게 살펴주는 손길에서, 그녀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결국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빗속을 뚫고 달려온 그 다급한 발걸음이, 다른 어떤 말보다도 크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윤은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다친 아이를 방치할 수 없었던 오빠의 마음—그 마음이 전생의 죄책감과 겹쳐 있다는 것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걸음이 불편한 그녀를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속도를 늦추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천천히 걸어. 서두르지 말고." 그 말에 하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팔에 살짝 몸을 기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윤은 그것이 단지 다리가 아파서라고 여겼다. 방에 도착한 뒤, 그는 하녀를 불러 물과 약을 가져오게 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여전히 방 안까지 스며들었고, 젖은 옷자락에서 흙냄새와 풀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약 발라줄게. 가만히 있어." 그가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동안 하린은 유난히 얌전하게 앉아, 그의 손끝이 자신의 무릎에 닿는 감각을 하나하나 새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그의 손을 좇았고, 숨소리는 조심스럽게 낮아졌으며, 어깨는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도윤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붕대를 감아주는 데 집중했지만, 문득 손끝이 그녀의 살갗에 닿는 순간, 이유 없이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왜 이러지.' 단순히 다친 여동생을 돌보는 손길일 뿐인데, 어째서 손끝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지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붕대를 감는 손놀림이 평소보다 느려졌고, 매듭을 짓는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며 붕대를 마무리한 그는, 하린의 얼굴을 마주 보며 짧게 웃어 보였다. "이제 됐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 웃음을 본 하린의 얼굴이 아주 잠깐, 놀랍도록 환하게 밝아졌다가, 곧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낙차가 도윤에게는 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는 그것을 그저 다친 아이가 안심해서 그런 거라고 넘겼다. 그러면서도 왠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 가슴 한구석에 남았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하린의 태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더 이상 도윤을 향한 시선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식사 시간마다 그의 곁에 앉는 걸 당연하게 여겼으며, 걸음걸이가 아직 불편한 척을 하며 그의 팔을 슬쩍 붙잡는 일도 늘어났다. 서영과 도현조차 그 변화를 두고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보았다. "이제야 좀 남매답네." 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일 때, 서영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처음엔 하린이가 낯설어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도윤은 애매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상한 불편함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남매답다는 그 말이, 정작 그가 느끼는 감각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남매다운 거리감이라기엔, 그녀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고, 그녀의 손이 너무 자주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날 저녁, 도윤은 창밖의 흐린 하늘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회색빛이 그의 마음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아이에게서 자꾸만 태리를 떠올리는 자신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이 아이가 정말로 무언가—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걸까.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그 붉은 빛깔이, 전생의 어떤 기억 한 조각과 자꾸만 겹쳐지려 했다. 그 답을 찾기에는, 아직 너무 많은 것이 어둠 속에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