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로부터 며칠 뒤, 도윤은 저녁 목욕을 마치기 위해 별채의 욕실로 들어섰다.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고 말을 달린 탓에 어깨가 뻐근했고, 그 뻐근함을 씻어내려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나무 욕조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저녁놀이 붉게 번지며 산 능선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 빛이 욕실 안 나무 벽에도 옅게 스며들어 공간 전체가 은은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물속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지나 목까지 차오르는 순간, 뭉쳐 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감각이 들었고, 그는 눈을 감은 채 그 감각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나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조차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새삼스러웠다. 처음엔 이 모든 게 세트장처럼 낯설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뜨거운 물의 온도와 나무 향, 저녁놀의 색까지도 몸에 붙어버린 듯했다.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감각에 젖어 있던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도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녀인가 싶어 헛기침을 하며 물속으로 조금 더 몸을 낮췄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다름 아닌 하린이었다. 손에 수건을 든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도윤이 놀라 몸을 물속으로 더 깊이 담그는 걸 보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도윤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반사적으로 몸을 가렸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하면서도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린은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순진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오라버니 등을 밀어드리려고요."
"필요 없어. 나가."
그가 목까지 물속에 담근 채 단호하게 말하자, 하린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손에 든 수건을 살짝 들어 보이며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었다.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는데, 그 정적이 도윤에게는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욕실 안의 김이 그녀의 발치에서 천천히 흩어지는 걸 보면서, 도윤은 왜 이 짧은 순간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순순히 등을 돌려 나갔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도윤은 그 아이의 얼굴에서—아쉬움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를 언뜻 본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도윤은 한참을 물속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뜨거운 물이 어느새 미열처럼 식어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방금 본 하린의 눈빛을 곱씹고 있었다.
그날 밤, 도윤은 유독 편치 않은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가 오빠의 목욕물에 들어오는 게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인가 싶어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그 논리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태리라면, 하고 도윤은 생각했다. 태리도 이 정도로 스스럼없이 남의 목욕물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린은 왜.
'알 바인가.'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뒤척였는지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도윤은 누군가 자신의 침대 곁에 서 있는 것 같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처음엔 꿈인가 싶어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그 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둠 속, 창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 아래, 하린이 침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얀 잠옷을 입은 그녀의 작은 몸이 달빛을 받아 유리 인형처럼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그의 이불을 가만히 정돈하는 손짓이 다정했지만, 도윤은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뭐 해, 여기서."
놀란 목소리를 억누르며 묻자, 하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요. 오라버니 자는 거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이 너무나도 태연해서, 도윤은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것에 놀라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어린애가 오빠 자는 걸 보고 싶다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인가, 태리도 예전에 자다가 그의 방으로 넘어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던 적이 있지 않았나. 그때는 그저 귀엽다고, 등을 두드려 재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등줄기가 서늘한지, 도윤은 자신도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하린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눈빛이 결코 어린아이의 순진한 애정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마치 그 눈이 어린 여자아이의 것이 아니라,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의 것처럼 느껴졌다면—그건 지나친 상상일까.
도윤은 이불 밑에서 손끝이 조금 떨리는 걸 느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긴장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우스움을 걷어낼 수 없는 위화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들어가 자."
도윤은 애써 담담하게 말하며 이불을 다시 끌어당겼다. 목소리에 힘을 주려 했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그 말이 조금 떨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린은 잠시 더 그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 발걸음이 어찌나 조용한지, 마루가 밟히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오래도록 눈을 뜬 채 어둠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달은 여전히 차갑고 멀었으며, 그 빛 아래 서 있던 하린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되풀이해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녀들 사이에서 도는 작은 소문 하나가 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하린 아가씨가 요 며칠 밤마다 도련님 방 근처를 서성인다는, 별것 아닌 듯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세숫물을 준비하던 하녀가 무심코 흘린 말이었는데, 도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서성인다니, 언제부터."
도윤이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묻자, 하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글쎄요, 벌써 며칠 되었다고들 하던데요. 저희도 그냥 아가씨가 잠이 없으신가 했지요."
그 대답이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도윤은 더 불안해졌다. 자신만 이 서늘함을 느끼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들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있는 건가. 이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정말 흔한 것인지, 아니면 하린이라는 아이만이 유독 이상한 것인지 도윤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그날 이후로 도윤은 밤마다 자신의 방문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문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 몸이 굳었고, 잠이 든 뒤에도 얕은 잠에서 몇 번이나 깨어나 방 안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 서늘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