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을 넘는 의붓동생

2화

며칠이 지나서야 도윤은 이 몸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설란 자작가에 입양된 지 이제 겨우 반년, 그전의 기억은 흐릿한 안개처럼 뭉개져 있었으나 적어도 이 집의 구조와 사람들의 얼굴은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며칠간 앓아누웠던 몸을 추스르며, 도윤은 천장의 무늬를 하나하나 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낯선 방, 낯선 침구, 낯선 창밖의 풍경. 나무로 짜인 창틀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겨울을 앞두고 서서히 색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 스산한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자신이 정말로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도윤은 몇 번이나 손끝으로 이불깃을 꾹 눌러보곤 했다. 차갑지 않았다. 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방을 오가던 하녀들은 도윤을 볼 때마다 조심스러운 존대와 함께 눈을 내리깔았는데, 그 태도에서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어떤 위치였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입양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 그러나 대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딘가 조심스럽고, 어딘가 거리를 두는 듯한. 입양부인 설란 도현은 명랑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로, 도윤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을 지어 보였고, 입양모인 설란 서영은 다정하지만 어딘가 관대함을 넘어선 무심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하린이 있었다. 도윤이 회복하여 처음으로 식당에 내려온 날, 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덟 살 여자아이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발 머리가 어깨 위로 곱게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인형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듯했으며, 그 눈—그 눈이 문제였다. 또래 아이의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했고, 지나치게 오래 도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지, 이 느낌.' 도윤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인물이 액자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설명할 길 없는 위화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단순히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난 어색함이라기엔 무게가 달랐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건가, 하고 도윤은 속으로 되물었다. 식탁 위에는 아침 식사가 이미 차려져 있었고,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이제 좀 낫느냐. 얼굴이 훨씬 좋아졌구나." "네, 덕분에요." 도윤이 대답하며 자리에 앉는 동안에도, 맞은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앉는 각도, 손을 뻗는 방향, 숨을 고르는 속도까지 모두 기록해두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도윤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물잔을 들었지만, 손끝이 미묘하게 굳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오라버니." 하린이 처음으로 그를 부른 호칭이었다. 짧고 낮은 목소리였는데,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애정이라기보다는 확인, 혹은 소유를 다지는 듯한 어떤 것처럼 들려서, 도윤은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어, 그래." 그가 어색하게 대답하자 하린은 그제야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가 다정해서였는지, 아니면 다정함을 흉내 낸 것이어서였는지, 도윤은 구분할 수 없었다. '웃는 게 왜 저렇게 부자연스럽지.' 인형의 관절을 억지로 움직여 만든 미소 같았다고, 도윤은 생각했다가 스스로도 좀 심한 비유인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낯설어서 그런 걸 거다. 이 세계의 아이들이 다 저런 건지도 모른다. 애써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결론이 나도 위화감은 가시지 않았다. 식사 내내 하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윤이 포크를 드는 손, 물을 마시는 목의 움직임,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가는 것 같았는데, 그 시선의 밀도가 너무 짙어서 도윤은 몇 번이나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애가 왜 저래.' 포크로 빵을 조각내는 동안에도, 도윤은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때문에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접시 위의 수프가 식어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의 신경은 온통 그 시선의 방향에 쏠려 있었다. 서영이 무언가를 물어오면 대답을 하고, 도현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면 웃어 보였지만, 정작 그 웃음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을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한 번, 정말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하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도윤의 눈을 마주 보았는데, 그 순간 도윤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여덟 살 아이의 눈에서 이런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상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시선을 견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식사가 끝나고 도현이 자리를 정리하며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도윤이도 이제 이 집에 적응했으니, 하린이랑 잘 지내려무나. 다만—" 그는 잠시 목소리를 낮췄다. "의붓이라 해도 남매의 선은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도윤은 그 말이 어딘가 당연한 것을 굳이 언급하는 듯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옆에서 그 말을 듣던 하린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풀리는 걸 그는 보지 못했다. '남매의 선이라니, 당연한 소리를 왜.' 도윤은 그 말을 그저 예의상 덧붙이는 훈계조로 받아들였다. 어느 집에서나 있을 법한, 새로 가족이 된 아이들 사이에 거리를 두라는 상투적인 잔소리. 그 이상의 의미를 읽어낼 이유가 없었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옆에서 웃으며 거들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지만, 너무 딱딱하게 굴지는 말고. 오누이끼리 서먹서먹한 것도 안 좋으니까." 그 상반된 두 말 사이에서, 정작 지켜야 할 경계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명확히 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는 끝이 났다. 식탁을 떠나며 하린은 도윤의 옆을 스쳐 지나갔는데, 그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린 것 같았다. 도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왠지 다시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흘려보냈다. '뭐라고 한 거지.' 물어보면 될 일이었지만, 그러기엔 그 아이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도윤은 그냥 걸음을 옮겼다. 오후 내내 도윤은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회복기를 핑계 삼아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벽에 걸린 그림들을 살폈는데, 대부분이 설란 가문의 조상들이라는 초상화였고, 그중 유독 낡은 액자 하나가 눈에 밟혔다. 먼지가 쌓인 걸 보면 오래 방치된 듯했는데, 그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어서 도윤은 한동안 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저 얼굴,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흐릿해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집에는 뭔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윤은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침대에 누워서도 낮에 마주쳤던 그 시선을 떨쳐낼 수 없었다. 태리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그 아이에게 있었던가—아니, 그럴 리 없다고 그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풀이해 말했다. 태리는 죽었고, 이 아이는 태리와 아무 관련도 없는, 이 낯선 세계의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 조용한 눈빛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도윤은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하린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천장의 무늬가 그 얼굴을 대신했다. 잠들기 위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대체 뭐길래.' 단순히 낯선 아이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잠을 설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도윤은 그 이유를 딱히 짚어낼 수 없어서, 결국 이유 없이 불안한 밤을 통째로 떠안은 채 뒤척여야 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 아래, 복도에서 아주 희미한 발소리가 지나간 것 같았지만, 그는 그것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발소리는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마치 누군가 방문 앞을 서성이다가 다시 돌아가는 듯한 규칙적인 간격으로 이어졌는데, 그 소리가 멀어질 때마다 도윤은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밑으로 스며드는 빛도 달빛뿐, 사람의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바람 소리겠지.' 그렇게 되뇌며 도윤은 다시 눈을 감았지만, 완전히 잠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밤, 문 저편에서 아주 오랫동안 서 있던 그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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