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박달구의 방으로 다시 불려간 것은, 사흘째 되는 새벽이었다.
도윤은 손끝에 남은 먹물 냄새를 맡으며 방문 앞에 섰다.
사흘 밤을 꼬박 새운 눈은 뻑뻑했다. 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맑았다.
낡은 장부를 안고 있는 팔에 무게가 느껴졌다. 종이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오래된 잉크 냄새.
문을 열자 박달구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그 앞에 탁자를 놓고, 도윤은 장부를 펼쳤다.
"찾았습니다."
박달구는 팔짱을 낀 채 눈만 움직였다. 시선이 장부 위를 훑고, 다시 도윤의 얼굴로 옮겨졌다.
"어디가 잘못됐지."
"이 항목입니다."
도윤이 손끝으로 짚은 곳은 곡물 거래를 기록한 줄이었다. 숫자들이 세로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중 한 줄이 유독 눈에 걸렸다.
"왕도 상인이 받아간 곡물량과 여기 적힌 대금이 맞지 않습니다."
도윤은 옆 장으로 넘겼다. 같은 상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이 대금도 낮게 잡혔습니다. 두 번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상인 쪽 장부 담당자가 두 번에 걸쳐 손해를 떠넘겼다는 뜻입니다."
도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박달구의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였다.
"우연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같은 항목에서, 두 번이나 벌어진 일입니다."
박달구의 눈이 좁아졌다. 그는 잠시 장부를 살피다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네 말대로면, 내가 그 상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거군."
"그렇습니다."
박달구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어떻게 바로잡지."
도윤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하지만 실은 이미 답을 준비해온 상태였다. 사흘 밤 동안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짚었던 계산이었다.
"당장 따지면 상인은 발을 뺄 겁니다."
"그러면."
"대신, 다음 거래에서 손해분을 되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도윤은 장부의 다른 항목을 짚었다. 이번엔 아직 체결되지 않은 다음 거래의 조건란이었다.
"여기, 물량 단위를 바꾸면 됩니다. 지금까지는 곡물 한 섬 단위로 계산했지만, 반 섬 단위로 세분화하면 상인 쪽에서 임의로 손해를 떠넘길 여지가 줄어듭니다."
"그게 왜."
"단위가 작아질수록, 숫자를 속이기 위해 조작해야 할 항목이 많아집니다. 한 번에 크게 속이는 것보다, 여러 번 작게 속이는 것이 훨씬 번거롭고 눈에 잘 띕니다."
박달구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리고 대금 지급 시점도 바꿔야 합니다."
"지급 시점을."
"지금은 물건을 넘긴 뒤 대금을 받습니다. 그러면 상인 쪽에서 장부를 조작할 시간이 생깁니다. 대금 일부를 먼저 받고, 나머지를 물건 확인 후에 받는 식으로 나누면, 상인이 장난칠 틈이 줄어듭니다."
도윤은 계속해서 다음 거래 조건을 어떻게 짜야 상인 쪽이 자연스럽게 되갚게 되는지, 차분히 설명해나갔다.
회사원 시절 익힌 계약 조항의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위약금 조항. 지급 시점 분할. 단위 세분화. 그 모든 것이, 마치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달구는 팔짱을 낀 채 끝까지 들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이었던 것이, 점점 계산으로 바뀌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쓸모가 있군."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래서, 뭘 원하지."
도윤은 잠시 숨을 멈췄다. 이 질문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자리와, 자유입니다."
"자리는 주지."
박달구는 자리에서 몸을 살짝 일으켰다.
"자유는 벌어야 해."
"어떻게 벌면 됩니까."
"그건 네가 알아낼 일이지."
박달구는 손을 흔들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순간부터 도윤은 잿골 안에서 발판을 얻은 셈이었다.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자리는 확보한 것이었다.
방을 나서던 도윤은, 문 앞에서 낯선 두 소년과 마주쳤다.
하나는 눈매가 날카롭고 몸집이 다부졌다. 팔뚝에 힘줄이 두드러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마른 몸에 웃음기가 많은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당신이 그 장부를 고쳤다는 애냐."
다부진 쪽이 먼저 물었다. 목소리에 가시가 있었다.
"고친 게 아니라, 문제를 찾았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다부진 쪽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홍철이다."
"마준이다."
마른 쪽이 덧붙였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았다.
"장부 얘기 듣고 왔다. 우리도 그 상인 쪽 거래에 관심이 있어서."
"관심이라니."
"우리는 물건을 굴려서 돈을 만드는 쪽이야."
홍철이 말했다.
"곡물 시세가 뒤틀리면, 우리한테도 손해가 온다."
"어떤 물건을 굴립니까."
"천이나 소금 같은 잡동사니. 큰돈은 안 되지만, 밑천을 만들 만큼은 돌아간다."
마준이 끼어들었다.
"우리 몫이 요즘 자꾸 줄어. 곡물값이 흔들리면서, 다른 것들도 같이 흔들리고 있거든."
도윤은 그 순간, 다시 능력을 발동시켰다.
웅—
[홍철 · 14세]
[상업 감각 우수 · 협상력 높음]
[숨긴 의도: 안정적인 거래선을 찾고 있음]
[마준 · 13세]
[계산 능력 우수 · 신중함]
[숨긴 의도: 홍철을 따라 새로운 자리를 잡고 싶어함]
두 소년 모두 잿골 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홍철은 사람을 다루는 감각이 있었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짚어내는 재주였다.
마준은 숫자를 다루는 감각이 있었다. 계산이 빠르고, 실수를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도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래선이 필요하다고 했죠."
홍철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래. 안정적인 곳으로."
"제가 만들 겁니다."
홍철과 마준이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열두 살짜리가 뭘 만든다고."
홍철이 낮게 되물었다.
"박달구 님의 장부를 바로잡은 게 저입니다."
도윤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다음 거래 조건도 제가 짤 겁니다. 단위를 나누고, 지급 시점을 쪼개는 방식으로요."
마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눈빛이 계산하듯 도윤을 훑었다.
"우리가 뭘 얻지."
"안정된 자리와, 커지는 몫입니다."
"몫이 커진다는 걸 어떻게 믿지."
"지금 곡물 거래가 뒤틀린 이유를 알아냈다는 게 증거입니다. 다음번엔 당신들 쪽 거래도 같은 방식으로 손봐줄 수 있습니다."
홍철이 낮게 웃었다. 웃음 속에 반쯔의 의심과 반쯤의 흥미가 섞여 있었다.
"말은 그럴싸하네."
"확인해보면 알 겁니다."
"만약 아니면."
"손 떼면 그만입니다. 잃을 게 없지 않습니까."
마준이 홍철을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홍철은 잠시 도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좋다. 한 번 지켜보지."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짧은 악수를 나눴다. 손끝이 닿는 순간, 도윤은 확실히 느꼈다. 잿골 한켠에서, 작지만 분명한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홍철의 손은 거칠고 단단했다. 마준의 손은 상대적으로 얇고 차가웠다. 서로 다른 두 손이, 같은 순간 도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조건은 며칠 안에 정리해서 알려주겠습니다."
"기다리지."
두 소년은 그렇게 돌아섰다. 도윤은 그들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도윤은 낡은 창고 안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바닥에는 짚더미가 깔려 있었다. 냄새는 익숙했다. 흙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그 위에 덮인 짚 냄새.
감정 능력으로 읽어낸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정리되고 있었다.
정칠성. 홍철. 마준. 세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각자의 능력, 각자의 숨긴 의도. 그것들이 마치 장부의 숫자처럼 도윤의 머릿속에 나란히 정렬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또 다른 창이 떠올랐다.
[복직(複職) 잠금 해제 조건 확인 중…]
생소한 문구였다.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도윤은 숨을 죽이고 그 글자를 응시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복직. 그 단어가 눈에 박혔다. 예전의 자리로, 예전의 능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일까.
[조건 1: 충성하는 자 세 명 이상 확보]
[조건 2: —]
두 번째 조건은 흐릿하게 뭉개져 읽히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글자는 모이지 않고 흩어졌다.
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세어보면, 정칠성과의 관계는 아직 충성이라 부를 수 없었고, 홍철과 마준은 이제 막 손을 잡은 참이었다.
셋이라는 숫자는 가까운 듯 보이면서도, 실은 아직 멀었다.
조건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다가왔다.
도윤은 창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나무판자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때, 창고 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칠성의 걸음과는 다른, 더 조심스럽고 은밀한 소리였다. 발끝을 세우고 걷는 듯한, 조심스러운 리듬이었다.
도윤은 몸을 낮췄다. 숨을 죽이고, 벽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골목 어귀에, 낯선 자들 몇이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잿골의 복장이 아니었다. 낡고 헐렁한 옷이 아니라, 각을 잡은 갑주였다.
태룡 제국 특유의 짙은 색 갑주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달빛이 갑주의 표면을 스칠 때마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광택이 번쩍였다.
도윤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다.
그들의 시선은, 정확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