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잿골의 밤은 다른 곳보다 더 빨리, 더 깊이 내려왔다.
해가 채 지지 않았는데도 골목 사이사이는 이미 검게 물들었다. 낮게 늘어선 지붕들이 하늘을 가렸고, 그 아래로 스며드는 빛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잿골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빛보다 그림자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는 곳.
도윤은 사흘 동안 골목 뒤편 창고에서 몸을 숨기고 지냈다.
창고 안은 낡은 나무판자 냄새와 오래된 곡물 부스러기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닥은 눅눅했다. 밤이 되면 벽 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도윤은 그 바람을 등지고 몸을 웅크렸다.
갈비뼈의 통증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예전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혼란은 그렇지 않았다.
두 개의 기억은 이제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밤마다 잠들기 전, 도윤은 자신이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서른두 살의 습관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계약서의 문구를 따지듯 사람의 말을 곱씹는 버릇. 상대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계산하는 눈. 그런 것들이 열두 살 소년의 몸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동시에 열두 살의 감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배고픔을 느끼면 곧바로 뱃속이 뒤틀리는 반응. 무서운 것을 보면 다리가 먼저 움직이려는 본능. 어른의 이성으로 눌러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도윤이라는 이름 아래 서른두 살의 습관과 열두 살의 감각이 뒤섞여 하나의 인격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질까 봐. 하지만 사흘을 보내며 도윤은 조금씩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두 삶은 서로를 지우는 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 셋째 날 아침, 창고 문틈으로 낡은 모자를 쓴 사내가 나타났다.
"어이, 꼬맹이."
도윤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끝에 흙바닥의 차가움이 닿았다. 사내의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각진 턱, 깊게 눌러쓴 모자,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절제된 무게감. 하지만 낯익은 감각이 있었다. 며칠 전 골목 그늘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시선. 그 시선의 온도와 지금 이 사내의 눈빛이 정확히 같은 온도였다.
"박달구 님이 부르신다."
이름을 듣는 순간 도윤은 눈앞에 다시 창을 떠올렸다.
[감정 발동 가능]
사내를 향해 능력을 발동시켰다.
웅—
[정칠성 · 27세]
[박달구의 직속 부하]
[숨긴 의도: 시험 결과를 그대로 보고할 예정]
'시험이었다.'
덕수와의 싸움도, 그 이후의 며칠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창고 안에서 몸을 숨긴다고 생각했던 사흘이, 실은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사흘이었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침을 삼켰다.
"제가 시험당하고 있었던 거군요."
정칠성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똑똑한 꼬맹이네."
"싫다면요."
"싫다는 선택지는 없어."
정칠성이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짧고 건조했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윤이 따라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도윤은 그를 따라 골목을 벗어났다.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빨랫줄에 걸린 낡은 옷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정칠성을 보면 시선을 피했다. 그중 몇몇은 도윤을 향해서도 짧게 눈길을 던졌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관심도 아닌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잿골 중심부, 낡은 창고를 개조한 건물 안에서 박달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훅 끼치는 냄새가 있었다. 오래된 나무와 술 냄새,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쇠 냄새. 방 안에는 몸집이 크고 팔뚝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가 낮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존재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도윤은 그 앞에 섰다. 다리가 살짝 떨리려는 것을 느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이름이 뭐냐."
"도윤입니다."
"나이는."
"열둘입니다."
박달구는 팔짱을 낀 채 도윤을 훑어보았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덕수 그놈, 무릎을 정확히 맞췄다더군. 우연이었냐."
도윤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나무 벽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밖에서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달구의 눈이 좁아졌다.
"우연이 아니라면."
"우연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박달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쓸모가 있다면 살려두지."
"쓸모가 없다면요."
"그야 뻔하지 않나."
박달구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방 안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톡. 톡. 톡. 마치 시간을 재는 듯한 소리였다. 도윤은 그 손가락을 향해 다시 능력을 발동시켰다.
웅—
[박달구 · 41세]
[잿골의 실질적 지배자]
[숨긴 의도: 새로운 눈, 새로운 손이 필요함. 최근 왕도 상인들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봄]
[급소: 없음 · 경계심 최상]
급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이들의 급소는 늘 무언가 하나로 좁혀졌다. 두려움, 욕심, 자존심.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두터운 경계심만이 벽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그만큼 경계가 두터운 상대였다.
하지만 숨긴 의도는 명확했다. 이 남자는 지금 사람을, 정확히는 쓸 만한 머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도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서른두 살의 습관이 먼저 움직였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의 감각. 지금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최근 왕도 상인들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보셨겠죠."
박달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팔짱을 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알지."
"보였습니다."
"보였다니."
"제가 쓸모가 있는 이유입니다."
박달구는 잠시 도윤을 응시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칠성은 문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놀람과 경계가 섞인 얼굴이었다.
"재밌는 놈이군."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왜 열두 살짜리와 거래를 해야 하지."
"제가 손해를 막아드릴 수 있으니까요."
박달구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 눈은 여전히 도윤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얼마나 쓸 만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좋다. 시험을 하나 더 주지."
그는 탁자 위에 낡은 장부를 던졌다. 종이 뭉치가 탁자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이 장부, 어디가 잘못됐는지 찾아봐. 사흘 준다."
도윤은 장부를 받아 들었다. 종이는 습기에 눌어붙어 있었다. 잉크는 흐릿했다. 손끝에 종이의 축축한 질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먹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첫 장을 펼치자 숫자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곡물의 입출량, 은자의 흐름, 거래 상대의 이름들. 서른두 살의 눈이 그 숫자들 위를 미끄러지듯 훑었다. 그러나 숫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이었다.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박달구는 손을 흔들었다.
"나가봐."
도윤은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정칠성이 따라붙었다. 그의 발소리는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까지의 무뚝뚝한 태도와는 다른 걸음이었다.
"운이 좋군, 꼬맹이."
정칠성이 문을 나서며 짧게 말했다.
"박달구 님이 저렇게 흥미로워하시는 모습, 오랜만이야."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장부를 품에 꼭 안았다.
골목을 걸으며 도윤은 생각했다. 감정이라는 능력은 상대의 정보를 읽어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어떻게 써야 신뢰를 얻고, 자리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판단은 전생의 회사원 시절 익힌 감각이 담당하고 있었다.
계약서의 문구를 읽어내던 눈. 협상 테이블에서 침묵의 무게를 견디던 인내.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한 발 앞서 말을 던지던 습관.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두 삶은 이제 서로 다투는 대신, 서서히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다. 열두 살의 몸이 가진 순수한 두려움과 서른두 살의 머리가 가진 계산이, 한 사람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도윤은 걸으며 장부를 다시 펼쳐보았다. 숫자 하나가 계속 눈에 걸렸다. 곡물 입고량과 실제 창고 재고 사이의 미묘한 차이.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을 댄 흔적이었다.
'박달구 밑에서 누군가 장부를 조작하고 있다.'
그 생각이 들자 도윤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이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자신의 자리가 결정될 것이었다.
골목 끝을 돌아 나가려던 순간, 도윤의 발이 멈췄다.
낯선 냄새였다.
흙냄새도, 사람의 땀 냄새도 아니었다. 은은하고 서늘한, 숲의 냄새였다. 잿골 어디에도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마치 비 온 뒤의 숲 속에 서 있는 듯한 냄새였다.
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골목 모퉁이, 낮게 드리워진 처마 그늘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긴 녹색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그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예리한 눈매가 정확히 도윤을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는 사람의 눈에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정칠성은 그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도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인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