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배고픔이었다.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허기. 위장이 안쪽에서부터 스스로를 갉아먹는 듯한 감각이었다. 도윤은 몸을 일으켰다. 낡은 나무판자 위였다. 판자는 습기를 먹어 거뭇하게 썩어 있었고, 등에 닿는 감촉은 딱딱하면서도 눅눅했다. 지붕은 반쪼가리만 남아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회색 구름. 낮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안 되는 흐릿한 빛.
잿골.
그 이름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가온 왕국의 왕도 외곽에 자리한 빈민가. 이 몸의 열두 해가 통째로 이 골목 안에서 지나갔다. 태어난 곳도, 죽어 나가는 곳도 대부분 이 골목이었다. 잿골이라는 이름은 오래전 큰불이 나서 온 동네가 잿더미가 됐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누군가 말해줬던 기억이 흐릿하게 스쳤다.
도윤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광대뼈가 앙상했다. 손목은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갈비뼈 아래 시퍼런 멍이 손끝에 닿았다. 누르자 통증이 화끈하게 번졌다. 숨을 들이켜자 옆구리가 당겼다.
살펴본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두어 개 더 있었다. 이 몸이 겪어온 시간을 짧게라도 짐작하게 하는 자국들이었다.
어제, 아니 그 이전의 기억이 조각조각 이어졌다. 훔치지 않은 빵을 훔쳤다는 오해로 시장 상인에게 맞았다. 상인은 굳은 얼굴로 몽둥이를 휘둘렀고, 주변 사람들은 구경만 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게 잿골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도윤은 등짝과 어깨를 두어 차례 맞고 골목까지 도망쳤다. 도망치는 내내 뒤통수가 뜨거웠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리가 풀렸고, 시야가 흔들리다가 완전히 꺼졌다. 그대로 쓰러졌고,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다른 삶의 기억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도윤은 이제 알고 있었다.
'전생.'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낯설었다. 서른두 살 회사원의 기억이었다. 매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사무실 책상 앞에서 야근하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던 삶. 그 기억이 열두 살 빈민가 아이의 기억과 지금은 하나의 뿌리처럼 얽혀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하는 일은 이제 무의미했다. 둘 다 도윤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낯섦이 두려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머릿속 어딘가에서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감각이 있었다. 전생의 습관인지, 아니면 원래 이 몸이 가진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혼란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그것을 끊었다.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러 겹으로 겹쳐 들렸다. 세 사람 이상. 뛰는 속도가 빨랐다.
"저기 있다!"
소년 셋이 골목 어귀에서 뛰어왔다. 도윤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손에는 곤봉 대신 각목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부러진 대나무 조각을, 다른 하나는 녹슨 쇠고리를 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하나같이 잿골 특유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도윤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허기가 다리의 근육까지 갉아먹은 듯, 무릎이 자꾸 꺾이려 했다.
주변을 살폈다. 빠져나갈 틈은 좁았다. 왼쪽은 무너진 담벼락, 오른쪽은 물이 고인 하수 구덩이. 셋 중 누구를 상대해도 승산은 없어 보였다.
그때, 시야 한켠에 다시 그 창이 떠올랐다.
[감정(鑑定) 발동 가능]
처음 보는 문구였다. 아니, 이 몸의 기억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던 것인지도 몰랐다. 도윤은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생각이 곧 능력이었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눈앞의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웅—
짧은 울림이 관자놀이를 훑었다. 두피 아래로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박덕수 · 12세]
[상태: 격분]
[숨긴 의도: 뺨의 흉터를 두목에게 자랑하고 싶어함]
[전투력: 낮음 · 급소: 왼쪽 무릎(예전 부상)]
글자들이 정확하게 눈앞에 나열됐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보인다.'
상대의 상태가, 의도가, 약점까지 고스란히 읽혔다. 이건 전생에도 없던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건 확실히 이 세계의 규칙이었다.
도윤은 곧바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나머지 둘에게도 같은 것이 통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웅—
[최기철 · 13세]
[상태: 흥분]
[숨긴 의도: 별다른 계산 없이 무리를 따라 움직임]
[전투력: 중간 · 급소: 없음]
웅—
[강노식 · 13세]
[상태: 초조]
[숨긴 의도: 덕수 눈치를 보느라 앞장서지 못함]
[전투력: 낮음 · 급소: 발목(약함)]
세 번의 울림이 연속으로 관자놀이를 훑고 지나갔다. 정보가 쏟아지듯 들어왔지만 머리는 어지럽지 않았다. 오히려 명료해졌다. 마치 흐릿한 안개가 걷히고 지도 한 장이 펼쳐진 느낌이었다.
'덕수는 무릎, 노식은 발목. 기철은 특별한 약점이 없지만 전투력은 중간.'
셋 중 가장 위험한 건 기철이었다. 하지만 앞장서서 움직이는 건 덕수였다.
소년들이 다가왔다. 맨 앞의 덕수가 각목을 치켜들었다. 뺨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아마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제 그 빵, 니가 훔친 거 아니었다며?"
덕수의 목소리는 컸다. 뒤에 선 기철과 노식에게 보이기 위한 목소리였다.
도윤은 대답 대신 왼쪽으로 반보 움직였다. 덕수의 왼쪽 무릎을 스치듯 지나가는 각도였다.
"우리 애들 몫 뺏기게 만들었으니까, 이제 니가 갚아야지."
덕수가 각목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어제 니 편들어준 놈도 없었잖아. 억울하면 억울한 거고, 우리 손해는 우리 손해지."
말이 되지 않는 논리였다. 하지만 잿골에서는 그런 논리가 통했다. 힘이 있는 쪽이 정한 것이 규칙이었다.
도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발밑의 흙바닥을 살폈다. 손에 쥘 만한 돌은 두어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독 각이 져 있었다.
각목이 날아왔다. 도윤은 몸을 낮췄다. 무릎이 살짝 꺾였지만 버텨냈다. 각목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갈 때, 바람이 정수리를 훑었다.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흙바닥의 돌을 집어 덕수의 왼쪽 무릎을 향해 던졌다.
거리는 짧았다. 하지만 정확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으악!"
덕수가 무릎을 감싸며 쓰러졌다. 예전 부상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나머지 둘은 순간 멈춰 섰다.
기철이 먼저 반응했다. 각목을 다시 고쳐 쥐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노식은 반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발목이 약하다던 정보가 그 순간 겹쳐 보였다. 무게 중심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였다.
도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무너진 담벼락과 하수 구덩이 사이, 몸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공간이었다. 어깨가 벽돌 모서리에 부딪혀 통증이 스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잡아! 저 새끼 잡아!"
기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쫓아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덕수가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고, 노식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무리의 중심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도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전생의 회의실에서 배운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좁은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 들어간 뒤에야 도윤은 벽에 등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뛰었다. 벽에 닿은 등이 축축했다. 땀인지, 아까 흙바닥에 쓸린 상처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었다.
'이게 정말 되는구나.'
감정. 상대의 상태와 약점을 읽어내는 힘. 이 몸에 새겨진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확신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도윤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앞에 대보았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스스로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조건이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만 되는 건가. 아니면 뭔가 조건이 있는 건가.'
궁금증이 일었지만, 지금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배는 여전히 뒤틀리듯 아팠고,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골목이었다. 낡은 지붕들, 갈라진 벽, 여기저기 걸린 젖은 천 조각들. 어디선가 상한 음식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잿골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골목 저편 그늘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낡은 모자를 눌러쓴 사내였다. 그는 방금 벌어진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얼굴이었다.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내의 옷차림은 잿골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낡았지만 찢어지지 않았고, 신발은 제대로 갖춰 신고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운 자세도 골목 아이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도윤이 돌을 던지던 순간을, 덕수가 쓰러지던 순간을, 그리고 도윤이 좁은 틈으로 빠져나가던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 눈빛이었다.
사내는 몸을 돌려 골목 안쪽, 잿골 깊숙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잿골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자, 박달구의 아지트였다.
골목 안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잿골 사람들 사이에서 박달구의 이름은 늘 낮은 목소리로만 오갔다. 그의 눈 밖에 나면 다음 날 아침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소문이 도는 자였다.
사내는 그 소문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벽에 등을 붙인 채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등줄기를 따라 스치는 서늘한 감각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이 아직 자신의 뒷목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골목 저편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늘도, 발소리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배는 여전히 뒤틀리듯 아팠다.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런데도 도윤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느낀 서늘한 감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자꾸만 짙어졌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잿골 깊은 곳 어딘가에서 낡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문 안쪽에서,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가 그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