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둠이었다.
먼저 냄새가 있었다.
곰팡이. 오래된 지푸라기. 그리고 피 냄새.
세 가지가 한꺼번에 코끝을 찔렀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조합이었다. 어딘가 눅눅한 창고 같기도 했고, 오래 버려진 축사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비릿한 쇠 맛만큼은 분명했다. 피였다. 누군가의 피, 아니면 자신의 피.
숨을 들이쉬자 갈비뼈 안쪽이 찢어지는 듯했다. 도윤은 눈을 뜨려 했다. 눈꺼풀이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힘을 주었다. 속눈썹 끝에서 마른 눈물자국 같은 것이 뜯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차가운 흙바닥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어 있었다. 누군가 오래 짓밟은 흔적이었다. 손톱 하나는 반쪽 갈라져 있었다. 그 틈으로 흙이 파고들어 있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자 등줄기를 타고 통증이 번졌다. 채찍 자국인지, 매질의 흔적인지 알 수 없는 상처들이 등판 전체를 뒤덮고 있는 듯했다. 살갗이 갈라진 자리마다 마른 피가 눌어붙어 옷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졌다.
웅—
낮고 무거운 울림이 뒤통수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종을 친 직후의 떨림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억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하나는 좁고 냄새나는 빈민가의 골목. 매질과 굶주림. 열두 살 소년의 몸이 겪어온 시간들. 배고픔에 이를 악물고 남의 집 담을 넘던 밤. 어른들의 발길질을 피해 좁은 골목 사이로 몸을 숨기던 순간들. 흙바닥에서 자던 밤의 서늘함.
다른 하나는 형광등 불빛 아래의 사무실. 키보드 소리. 팀장의 잔소리. 야근 후 마시던 캔커피의 씁쓸한 맛. 서른두 살 회사원의 삶. 모니터 앞에서 눈이 시큰거리던 순간들. 회의실 유리벽에 비친 지친 얼굴.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흔들리던 몸.
두 기억이 한 그릇 안에서 뒤섞였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나는 누구지.'
생각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두통이 뇌를 쥐어짜듯 조여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거렸다. 마치 누군가 두 개의 필름을 억지로 한 장에 겹쳐 인화하려는 것 같았다. 선명해야 할 것들이 뭉개지고, 뭉개져야 할 것들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어렴풋이, 시야 한 귀퉁이에 무언가 떠 있었다.
반투명한 창. 흐릿한 글자들.
[감정(鑑定)]
[복직(複職)]
두 단어가 눈앞에서 깜빡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새도 없었다. 뒤이어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상태: 위독]
[의식 안정화 실패]
글자들이 흔들리고 뭉개졌다. 눈앞이 다시 캄캄해지려 했다. 도윤은 그 글자를 붙잡으려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초점은 자꾸 미끄러졌다. 마치 물속에서 유리창 너머의 글씨를 읽으려는 것 같았다.
도윤은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정신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손톱 밑에 흙이 박혔다. 통증이 오히려 반가웠다. 통증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손톱이 흙 속에 깊이 박히자 통증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 통증을 붙잡고, 도윤은 자신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아직 여기, 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전생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야근이 끝나고 집에 가던 밤길. 가로등이 하나둘 꺼져가는 골목. 버스 정류장 앞에서 넘어진 노인을 부축했던 순간. 노인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그 감촉까지 생생했다. 상사에게 억울하게 야단맞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삼켰던 어느 날. 세면대 물에 얼굴을 몇 번이고 씻어내며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던 순간. 아무도 특별하다고 봐주지 않았던 삼십이 년의 시간.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취직해서 평범하게 늙어갈 줄 알았던 삶.
그리고 그 끝에, 트럭의 헤드라이트. 브레이크 소리. 그 다음은 없었다.
'죽었구나.'
생각이 명료해진 것은 그 한순간뿐이었다. 곧바로 현생의 기억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매질. 채찍.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
"이 자식이 훔친 게 확실하냐."
억울함을 호소할 새도 없이 이어진 발길질.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도윤은, 아니 이 몸의 주인은 두 번째로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와 비슷했다. 뚝, 하는 짧고 건조한 소리. 그리고 이어진 숨 막히는 고통.
몸의 주인이었던 소년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매질은 계속되었다. 도윤의 머릿속에서, 소년의 기억과 회사원의 기억이 동시에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는 그 통증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 부당함에 이를 갈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두려운 것은 매질도 아니었다. 두 개의 삶이 한 몸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며 다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삼십이 년을 살아온 회사원의 기억이 선명한데, 동시에 열두 살 소년이 겪어온 굶주림의 감각도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그 경계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의식 붕괴 위험도 상승]
글자가 붉게 물들었다. 도윤은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무엇을 잡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손끝이 흙바닥을 스쳤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흙이 흘러내렸다. 그 미끄러지는 감각조차도 그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 감각이라도 붙잡고 있으면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다시 웅—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더 크고, 더 낮았다. 두개골 안쪽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신 차려.'
그 말조차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회사원 도윤의 목소리인지, 소년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고 느린 걸음. 신발 밑창이 마른 흙을 밟는 소리. 하나. 둘.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발소리에는 어떤 서두름도 없었다. 마치 이미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발소리 사이의 간격이 일정했다. 규칙적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도윤은 눈을 뜨려 했다.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반투명한 창의 글자들도 함께 흔들렸다. [의식 붕괴 위험도 상승]이라는 문구가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박이 뛰는 듯 보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꿈치가 흙바닥에 닿았다가 다시 미끄러졌다. 온몸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무력하게 느껴졌다.
발소리가 문턱 앞에서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짧지만 긴 정적이었다. 도윤은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그림자가 그를 덮었다.
빛이 차단되는 감각이 먼저 느껴졌다. 눈꺼풀 너머로도 어둠이 한층 짙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자신의 위로 다가와 있다는 감각.
누군가의 손이 뻗어왔다.
손끝이 도윤의 어깨에 닿았다.
그 손은 크고, 거칠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어깨의 상처 자리를 스치자 통증이 번졌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진 것은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알 수 없는 냉기였다. 사람의 손이라기엔 지나치게 차가웠다.
도윤은 그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명령을 듣지 않았다. 팔도, 다리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의식만이,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만이 그 손의 감촉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도윤의 의식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어깨에 닿은 그 차가운 손끝의 감촉이었다. 그리고 그 손끝이 무엇을 하려는지, 도윤은 끝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