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실 저는 히든보스입니다

2화

저녁 식사 시간, 공작가의 식탁은 조용했다. 은촛대 위로 흔들리는 불빛.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식탁 위에는 스프 그릇과 구운 고기, 그리고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가 놓여 있었다. 강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오늘 연무장에서 이겼다는 얘기 들었어. 강신은 국물을 뜨던 숟가락을 멈췄다. 그런 것 같은데. 강아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으로 이긴 거라며.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 무슨 표정. 뭔가 감추고 있는 표정. 강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 탓이겠지. 강아린은 포크 끝으로 접시를 톡톡 두드렸다. 소리가 은근히 신경을 긁었다. 강신은 그 소리를 무시하며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국물이 이미 식어 있었다. 강아린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동부 국경 얘기 들었어? 몬스터 웨이브라니. 강신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들었어. 아빠가 곧 출정하실지도 모른대. 강도현은 식탁 상석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인잔을 든 손이 미동조차 없었다. 강신은 그 침묵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아빠는 저런 얘기가 나오면 늘 저렇게 조용해지지. 전생에도 그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린아. 강신이 낮게 불렀다. 왜. 조심해. 이번 웨이브, 생각보다 클 수도 있어. 강아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무슨 뜻이야. 그냥 느낌이야. 이 웨이브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강아린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쨍, 하고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빠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검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말이 날카롭게 꽂혔다. 강신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그냥 감이라니까. 감으로 사람들 목숨 걱정하는 거야? 강아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얼음의 영애라는 별명이 이럴 때마다 실감났다. 강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말해봐야 안 믿겠지. 전생의 기억이라고 하면 더 웃긴 소리가 되겠지. 그래서 강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진짜 정보를 흘려도 근거 없는 걱정처럼 들릴 뿐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동부 국경 너머에서 뭔가 더 큰 게 준비되고 있다는 것. 그런 걸 말해줘도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미래를 안다는 사실이 이렇게 쓸모없을 수도 있구나. 강신은 씁쓸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능력 하나 없이 정보만 아는 게 무슨 소용이야. 강도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신. 강신은 고개를 들었다. 네. 요즘 검술 훈련 성과가 지지부진하다고 들었다. 강신은 순간 숨을 삼켰다. 오늘 연무장에서 이긴 건. 한 번 이겼다고 실력이 오른 게 아니지. 강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강신은 입을 다물었다. 식탁 아래로 무릎 위 손을 꽉 쥐었다.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해야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생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천추호검을 언제까지 미룰 셈이냐. 가문의 비전 검술 이름이 나오자 식탁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촛불이 흔들렸다. 네가 익히지 못한다면, 후계 문제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강아린이 흠칫 강신을 쳐다봤다. 강신은 애써 침착한 얼굴을 만들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강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낮은 소리를 냈다.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식탁에 남은 강신과 강아린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강아린이 먼저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강신은 텅 빈 식탁을 내려다봤다. 식어버린 스프,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 그리고 반쯤 남은 와인잔. 검술이 안 된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후계자. 원작 시나리오와 어긋나지 않는 방향이었다. 다만 그 뒤에 淫魔의 힘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천추호검이라니. 원작에서도 그 검술을 익히지 못해서 쫓겨나는 전개였던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정확한 건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가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동부 국경의 웨이브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두 가지 다 피할 수 없는 흐름처럼 느껴졌다. 방으로 돌아온 강신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에서 은은한 세탁 비누 냄새가 났다. 검은 그림자가 발치에서 올라와 배 위에 자리를 잡았다. 설이었다. 새까만 털에 노란 눈동자. 너라도 내 편이지. 고양이는 골골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강신은 손을 뻗어 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 녀석 하나 믿고 사는 것도 웃기지. 강신도 눈을 감았다. 오늘은 유난히 잠이 빨리 올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낯선 빛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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