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해진 패배를 베다

4화

박도윤의 눈빛이 달라진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저거, 스승님 눈빛이 아닌데.' 여태까지는 봐주는 눈빛이었다. 방금 그 눈빛은... 아니었다. "다시."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라니, 이거 안 좋은 신호인데.' 예전에 게임할 때도 그랬다. 보스가 웃으면서 "한 번 더" 하면 그게 진짜 시작이었다. 타탓! 그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파고들었다. 부웅! 콰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팔이 저릿했다. '아니, 이 사람 지금까지 진짜로 살살 봐준 거였네.' 방금 전까지의 대련은 그냥 걸음마 연습이었던 거다.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의식적으로 움직인다기보다는, 몸이 먼저 앞서갔다. 머리로 생각할 틈이 없었다. 생각하면 늦었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목검이 코앞까지 와 있었으니까. [노력치 3/???] 숫자가 조금씩 늘어날수록, 세상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려지는 감각이 있었다. '이거 완전 게임에서 레벨업 컷씬 같은데.' 주인공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갑자기 시야가 느려지고, 배경음악이 바뀌고, 그러다 각성하는 그런 장면. 근데 그게 지금 나한테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참으며 다시 발을 굴렀다. 타앙! 타앙! 콰직—! 검끝이 부딪히는 리듬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박도윤의 검로가 어디로 향할지, 아주 잠깐씩 보이는 것 같았다. '보인다고 해도 몸이 못 따라가면 소용없는데.' 그런데 몸이 따라갔다. 이상하게도, 따라갔다. 마지막 순간, 내 검끝이 박도윤의 목검을 완전히 튕겨냈다. 그의 목검이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또각, 하고 목재가 흙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훈련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박도윤이 맨손으로 서 있었다. 무기를 잃은 채로. "...허." 그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나도 숨을 몰아쉬며 검을 늘어뜨렸다. 팔이 후들거렸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겼다고?' 스승을, 실전에서, 몇 주도 안 된 수련으로? '아니 이거 좀 말이 안 되는데.' 무협지에서도 이런 전개면 최소 몇 년은 스킵하고 나오지 않나. '이거 완전 만화 주인공 클리셰잖아.' 주인공이 스승을 이기고, 스승은 놀라서 무릎을 꿇고, 그 뒤로는 진짜 사제 관계가 시작되는. 근데 실제로 벌어지니까 소름이 돋았다. 만화로 볼 때랑 직접 겪을 때랑 이렇게 온도차가 심할 줄은 몰랐다. 그때 훈련장 담장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 몇이 담벼락 틈으로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족히 네댓 명은 되어 보였다. 담벼락 위로 삐죽 솟은 머리들이, 무슨 극장 관객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 지금 그거 보셨어요?" 한 하녀가 속삭였다. "도련님이 박 집사님을..." 다른 하녀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어머, 저 방금 눈으로 본 게 맞나요?" 세 번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이거 안 좋은 그림인데.'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런 내 바람은 아무도 몰라줬다. 애초에 이 저택에서 조용히 산다는 게 가능한 목표였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입단속 좀 시켜야 하나.' 그런데 뭘 어떻게 입단속을 시킨단 말인가. 내가 하녀들한테 가서 "이거 소문내지 마세요" 하고 부탁하는 그림도 웃기고, 협박하는 그림은 더 웃겼다. 박도윤은 떨어진 목검을 주우면서도 시선을 나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놀라움도 아니었고, 분함도 아니었다. 그건... 뭔가에 완전히 매혹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거 좀 무서운데.' "도련님." 그가 무릎을 꿇었다. 흙바닥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당황했다. "뭐, 뭐하는 거야?" 나는 짐짓 오만하게 물었지만 속으론 완전히 당황한 상태였다. '아니, 무릎은 왜 꿇어.' 이거 완전 옛날 사극에서 신하가 임금 앞에서 하는 그거잖아. "저는 예전에... 전장에서 판단을 잘못해 부하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목소리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무겁고, 낡고, 오래 눌러둔 것 같은 톤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누군가를 온전히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어깨도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 도련님의 검을 보고 다시 믿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거 완전 소년만화 스승 각성 신 아닌가.' 배경에 벚꽃 날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헛기침부터 했다. "흠, 흠."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뭐, 앞으로도 스승 노릇을 계속하겠다는 거야?"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들며 답했다. 그 눈빛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정면으로 마주치기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저는 이제부터 스승이 아니라, 도련님의 검이자 방패가 되겠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그 길이 어떤 길이든이라니, 너무 무서운 대사인데.' 이거 보통 이런 대사 치는 캐릭터는 나중에 주인공 대신 죽거나, 아니면 무슨 배신 엔딩 있거나 그런 거 아닌가. '아니, 지금 이런 걱정할 때가 아니지.'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어색하게 목을 긁적였다. "...그래, 뭐, 알아서 해." 최대한 담담하게 넘겼지만, 심장은 조금 두근거리고 있었다. 든든한 아군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다는 느낌. 그게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좀 뿌듯하기도 했다. '이런 걸 두고 사제 관계라고 하는 건가.' 박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떨어진 목검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무슨 성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챙겨 넣었다. '저거 그냥 목검인데.' 훈련용 목검을 저렇게까지 소중히 다룰 필요는 없지 않나. 그날 저녁, 나는 방에서 그 하녀들이 나눴던 얘기를 다시 떠올렸다. '저 하녀들, 오늘 있었던 일 다른 데다 말 안 하겠지?' 괜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 저택은 좁았다. 소문이 도는 속도가 무서울 만큼 빠른 곳이었다. 하인들 방, 하녀들 방, 다 붙어 있는 데다가 서로 할 일도 없으니 온갖 얘기가 밥상머리에서 오가는 곳. '오늘 있었던 일이 밥상머리 안주가 되면 곤란한데.' 도련님이 집사를 검으로 이겼다는 얘기가 퍼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좋게 퍼지면 다행이지만, 이상하게 부풀려질 가능성도 있었다. '설마 무슨 저주받은 도련님이 갑자기 힘을 얻었다는 식으로 퍼지진 않겠지.' 아니면 반대로, 박도윤이 일부러 져준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 수도 있고. 이 저택의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얘기라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됐다. 나는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애써 잠을 청했다. '그래, 별일 없을 거야.' '하녀들도 다 자기 일이 바쁘겠지, 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사흘 뒤에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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